뇌과학이 자유를 제한하는 이유

'나는 뇌가 아니다' 책 후기

by 정도겸

정확히는 '신경중심주의'가 인간 자유를 제한하는 이유겠다.

오랜만에 내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좋은 책이 있어 각 잡고 공부하듯이 읽었다. 바로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나는 뇌가 아니다>이다. 올해가 아직 한 달 정도 남았지만,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고 싶다. 뇌인지과학을 공부하면서 들었던 의문을 시원히 긁어주는 철학서였으며, 이 책을 읽고 나는 조금 자유로워졌다. 이 감동을 담아 책을 읽은 후기를 적어보겠다.


뇌인지과학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은 이런 질문에 부딪힌다. 내가 공부하는 것이 인간일까, 뇌일까? 뇌과학 대중서를 탐독하거나, 더 나아가 대학에서 뇌과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인간을 알고 싶어 한다. 공부를 하다 보면 연쇄적으로 열렸다 닫히는 이온채널과, 활동 전위가 생성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전기생리학 이론, MRI로 찍은 흑백의 뇌 사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게 과연 얼마나 인간을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최근에 썼던 나의 자전적인 에세이에서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펼쳤다.


" fMRI를 이용하면 활성화되어 산소를 많이 소비하고 있는 뇌 부위를 볼 수 있다. 이 영상에 색을 먹이면 우리가 익히 보는 알록달록한 뇌 사진을 얻는다. 교과서에 실린 형형색색의 뇌 사진을 보면서 또다시 ‘이 사진에 찍힌 것이 대체 뭐지’라는 의문을 가졌다. 세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뇌 부위를 찍은 사진과, 사람이 현실에서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 숨 쉬는 모습을 연결하기엔 아주 큰 간격이 있었다. 이쯤 와서야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뇌가 갖는 미스터리한 감각에만 매료되었다는 것을. 뇌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지 공부하기만 하면 나에게 답을 내려줄 것이라 믿었다."


'뇌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지 공부하기만 하면 나에게 답을 내려줄 것이라 믿었다'는 부분을 주목하라. 인간의 자아, 의식과 행동은 모두 뇌가 구성한다는 사고방식을 이 책에서는 신경 중심주의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 사고방식을 별로 안 좋아한다.


신경 중심주의의 대표적인 사고방식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뇌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이미 결정된 행동을 산출한다. 톱니바퀴라고 하면 너무 구시대적으로 보일까 봐 덧붙여보고 싶다. 활동 전위(action potential)는 뉴런과 뉴런 사이에 신호를 전달하는 전기적인 현상이다. 신경 중심주의에서는 한 번 상류의 뉴런에서 생성된 활동 전위는 하류의 뉴런으로 쏟아지고, 언제나 일정한 결괏값을 도출한다. 따라서 우리의 행동은 오로지 생물학적인 뇌가 만들어내며, 인간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고 싶다면 뇌를 보면 된다. 가능하면 몇 만 년 전의 인류에서부터 뇌가 진화해 온 과정을 생각해 보면 좋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다정한 것은 진화적으로 그런 뇌가 잘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혹은 우리가 약자를 배척하는 이유는 진화적으로 그런 뇌가 잘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이상하다 생각하겠지만, 모순되는 인간의 행동을 모두 뇌로 설명하고자 하면 이런 상황이 펼쳐진다. 모든 것이 뇌와 진화적 논리로 환원되는 것, 그것이 신경중심주의고 이것은 하나의 사상이다.


신경 중심주의가 하나의 사상이고 철학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뇌인지과학을 공부하다 보면 정말로 뇌가 나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전지전능함을 믿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신을 믿는 사고방식과 크게 다름이 없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나를 뇌의 전지전능함에 빠지게 했던 논문을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1983년에 발표된 Libet의 논문으로 준비 전위(readiness potential)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Libet은 피험자에게 자신이 원하는 아무 때에나 손가락을 굽히라고 시켰다. 피험자가 손가락을 굽히기 전, 손가락을 굽혀야겠다는 의도가 발생한 시점이 있을 것이다. 피험자는 그 시점을 보고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피험자의 뇌 활동은 EEG를 통해 측정된다. 결과적으로 손가락을 굽히겠다는 의도는 실제 행동을 하기 약 200 밀리세컨드(ms) 전에 발생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준비 전위는 의도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행동하기 약 550ms 전에 발생하기 시작했다. 즉 뇌에서 준비 전위가 발생하고, 그 후에 의도가 생기며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이 논문은 우리가 의도하기 전에 이미 뇌에서 행동을 유발하기 위한 전기적 활동이 발생한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자유 의지가 존재하는가'하는 철학적 질문을 낳았다.


나 같은 신경중심주의자들은 이런 결과가 하나 나오면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깊은 생각에 빠지다가 섣불리 답을 내리고 싶어 한다. 주로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고, 모두 뇌가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하는 것뿐이라는 결론으로 다가간다. 후속 연구를 통해 준비 전위가 발생하더라도 의도를 통해 행위를 중단하거나, 행위를 바꿀 수 있었다는 점이 밝혀져도 말이다. 애초에 준비 전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단순한 노이즈인가? 시간의 흐름을 예측하는 것인가? 어떤 사건의 발생을 기대하는 것인가? 적어도 준비 전위는 경사로에서 굴린 바위처럼 우리를 정해진 운명으로 몰고 가는 초월적 존재는 아닌 듯싶다. 그럼에도 우리는 쉽게 뇌과학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고 싶어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 편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내가 그저 뇌에 프로그래밍한 대로 움직이는 인형이라면, 내가 저지르는 모든 실수 혹은 악행은 뇌가 시켜서 그런 거라고 하면 된다. 조금 더 설득력을 주고 싶다면 내가 한 행동이 뇌가 산출한 가장 생존하기 좋은 최적의 선택이라고 보면 된다. 혹은 유전자 번식을 위한 행동이었다든가. 나의 행동은 그렇다 치고 남의 행동도 설명하기 편해진다. 나와 마찬가지로 타인도 생존을 위해 프로그래밍된 존재라면, 그의 의도를 파악하거나 마음을 헤아릴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타인을 그렇게 대할까? 우리는 단지 다정하기를 선택해서 다정해질 수는 없는 걸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여러 주장을 펼치는데, 가장 처음 시도한 논증은 '물질적이지 않은 정신이 존재한다'이다. 저자는 아무리 뇌 속에서 인간 정신을 찾아보려 해도 그 모든 시도는 실패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 정신, 자아, 곧 '나'는 뇌의 어떤 큐빅 속에 존재하지도, 뇌 자체도 아니고, 그저 정신이다. 이 말은 나 같은 신경중심주의자에게는 엄청난 발언이다. 나는 '나'가 뇌 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뇌인지과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뇌영상 기술이 지금보다 훨씬 발전하면, 나는 '나'를 모니터 안에서 관찰할 수 있으리라 믿었고, 더 기술이 발전하면 '나'를 복제하거나 어떤 도서관에 업로드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 사고 과정은 내가 뇌과학을 공부하면서 SF를 쓰게 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인간 정신, '나'가 눈에 보이는 실체라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커피잔을 보듯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결국 정말 대단한 MRI를 만들어내어 뇌 주름 어디엔가 끼어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때쯤 되면 나도 신이 나서 얼마가 들든 상관없이 MRI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기계 속에서 자다 나와서 내 뇌를 찍은 모니터를 본다. 곧 뇌 속의 '나'를 본다. 그런데 이 순간, 보는 '나'와 보이는 '나'는 동일한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내가 커피잔을 볼 때, 나와 커피잔이 동일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보는 '나'와 보이는 '나'는 동일할 수 없다. 이 문제를 가리켜 근본적 비대상성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나'는 '나'가 인식하는 어떤 대상과도 엄밀하게 동일할 수 없다(pp. 273).


정신적인 무언가가 존재함을 보이기 위해, 저자는 의식의 성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정신은 총체이고, 의식은 정신을 이루는 한 부분이다. 의식은 2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지향적 의식, 또 다른 하나는 현상적 의식이다. 지향적 의식은 외부를 향하는 의식이다. 무언가를 보고, 만지고, 듣는 의식을 말한다. 현상적 의식은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이다. 우리는 같은 음식을 먹어도 다른 맛을 느낀다. 색깔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는 색깔이 당신에게도 똑같이 보이리라는 법이 없다. 이러한 주관적 체험을 철학에서는 '퀄리아'라고 부른다.


프로그래밍된 어떤 것들은 지향적 의식은 가질 수 있지만 퀄리아는 가질 수 없다. 로봇 청소기도 방바닥에 놓인 물건을 '보고' 그것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로봇 청소기는 의식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지향적 의식과 현상적 의식을 같이 갖고 있어야 그 존재는 의식이 있다. 나 같은 신경 중심주의자는 퀄리아 또한 뇌 어딘가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그리고 뉴런 회로의 어떤 부분을 지지면, 내게 끔찍한 신맛과 느글거림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 양파를 상큼한 사과의 맛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신경 중심주의자는 퀄리아가 존재하는 이유를 생존을 위해서라는 '객관적인' 말로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객관적인 언어도 결국 우리의 주관적 체험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가시광선을 전자기 스펙트럼 한 부분에 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적외선과 자외선과 구분되는 바로 그 지점에 말이다. 바로 우리가 색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색을 본다'는 주관적 체험 없이는 스펙트럼이라는 객관성은 달성할 수 없다. 어떤 객관성도 뿌리를 쫓아가면 우리의 주관적 체험이 시작이다. 그래서 우리의 주관적 체험은, 퀄리아는 어느 순간에는 그냥 존재하며, 어떤 객관적인 언어로도 환원될 수 없다. 이를 들어 환원 불가능성 주장이라고 한다.(pp.173)


저자가 인간 정신은 존재한다는 주장을 펼친 이유는 인간의 선택이 자유롭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 그 선택은 오로지 뇌의 프로그램으로만, 인간의 생존욕구에 의해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의 자유가 작동한다. 저자는 충족 이유율을 주장한다. 이 원리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위한 필요조건의 목록이 다 갖춰지면,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에 충분하다는 원리다(pp.365). 내가 10만 원짜리 빈티지 컵을 산 상황을 생각해 보자. 이 사건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들은 무엇이 있을까.


신경 중심주의자들이 내건 조건은 다음과 같다.

1-1. 그 빈티지 컵에 반사된 빛이 내 망막 시각세포를 자극해 상을 맺는다.

1-2. 컵의 모양과 색깔이 내 도파민 회로를 자극하여 사지 않으면 안 될 충동을 일으킨다.

1-3. 어렸을 때부터 학습된 결과로, 나의 뇌는 내가 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1-4. 인간은 원래 아름다운 것들로 둥지를 꾸미고, 스트레스를 낮추며 생존 확률을 높였다.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건다.

2-1. 나는 아름다운 것을 감상할 때 기분이 좋다.

2-2. 나는 주관적 경험을 통해 그 빈티지 컵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2-3. 내 경제 상황을 볼 때, 10만 원짜리 빈티지 컵은 며칠 맨밥을 먹으면 살 수 있다.

2-4. 나는 최근에 장식장을 들였고, 그 공간을 꾸밀 때 충족감을 느낀다.


저자는 1-1~4의 조건도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으며, 그건 2-1~4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열거된 모든 조건들과 열거되지 못한 많은 조건들(지구에 중력이 존재하여 빈티지컵이 똑바로 진열된다 등)이 모두 모여 내가 빈티지컵을 사게 된 사건을 일어나게 만든다. 1-1~4의 조건은 엄격한 원인이고, 2-1~4의 조건은 이유다. 엄격한 원인은 무조건 결과를 불러오지만 이유는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다. 내가 10만 원을 지출할 능력이 된다고 해서 무조건 10만 원짜리 빈티지컵을 사게 되지 않듯이. 조건의 목록에서 원인도 있지만 이유가 차지하는 공간이 분명히 있다. 그 공간이 우리의 자유다. 신경중심주의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으로 엄격한 원인이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율은 크게 상관이 없다. 어차피 필요한 원인과 이유가 모두 갖춰지지 않으면 그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단락까지 읽고서 나는 조금 더 자유로워졌는데, 내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돌파구를 얻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제는 '인간의 존재 이유는 번식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이다. 어떤 종교적인 교리에 의해서 이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고, 혹은 다윈주의에 깊게 빠져있을 때도 비슷한 주장을 펼치게 된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상대방이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 같다. 가끔은 깊이가 보이지 않는 구덩이에 빠진듯한 아득함을 느낀다. 나의 사상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들을 때, 같은 세계관에 존재하는 인간이 맞을까 하는 의문에 빠지고 쉽게 상대방을 비인간화한다. (이건 나의 나쁜 버릇이다) 상대방의 사상을 바꾸겠다거나 설득하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하는 고민은 항상 해왔다.

어떤 사람 A가 '인간의 존재 이유는 번식이다'라는 주장을 펼치는 사건을 충족 이유율에 따라서 생각해 보자. 어쩌면 정말로 '1. 인간 뇌는 번식을 위한 모든 행동에 우호적이다'라는 원인이 존재할 수도 있다. 이 조건을 정당화하는 것은 뇌과학과 생물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러나 이 조건은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2. A는 번식에 우호적이다'라는 이유가 존재한다. A는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에 따라 번식을 위한 행위를 수호하기로 마음먹었다. 또한 A는 그의 의지로 '인간의 존재 이유는 번식이다'라는 주장을 퍼뜨리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A가 의지에 따라 그렇게 행동하는 것처럼, 나도 나의 의지에 따라 '인간의 존재 이유는 번식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나와 A는 자유롭다는 점에서 같은 층위에 있으며 다른 세계 사람이 아니다.


다른 한 가지 문제는 정말 말하기 조심스럽다. 내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게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무서운 물음을 하게 된다. 어떤 행위인지 자세히 묘사하고 싶지 않다. 그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여자들에게 큰 실례이기 때문이다. 또 그 실수를 저지른 여성들도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저질렀다고 믿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실수' 정도로 적당히 서술하고 넘어가겠다. 가끔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심지가 흔들리고, 오랫동안 가스라이팅을 당하다 보면 절대 그런 의문을 갖고 싶지 않아도 사고가 그쪽으로 흘러간다. 마찬가지로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건을 충족 이유율에 따라 분석해 보자. '1. 내 성염색체에 새겨진 한계가 있다'는 원인이 있을 수 있다.(과연 그럴까?) 이것 또한 정당화하려면 생물학적 연구가 필요하며, 이 조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또 다른 조건으로 '2. 어떤 이유'가 필요하다. '어떤 이유'를 기반으로 나는 실수하기를 선택했다. 실수를 하지 않거나 실수하는 중간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이 선택할 수 있었다는 지점이 나를 무엇보다 자유롭게 했다. 이 문제를 너무 뭉뚱그렸기 때문에 설명이 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 정도로 묘사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충족 이유율은 나에게 새로운 사고방식을 열어주었으나 여러 의문점을 남겼다. 주된 의문은 내가 길을 가다가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사건을 상상했을 때 발생했다. 충족 이유율에 따르면 모든 필요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내가 길을 가다가 얻어맞은 사건이 발생한다. 그 필요조건에는 엄격한 원인도, 이유도 존재할 텐데, 과연 그중에 '얻어맞은 나'의 자유를 옹호할 만한 이유들이 있을까? 즉 이 사건에서 얻어맞은 나의 선택이 개입할 여지가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을 '내가 얻어맞은' 일이 아니라 '누가 길 가는 나를 때린' 일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충족 이유율은 주체의 시점에서 사건을 바라볼 때만 적용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솔직히 이 철학서의 모든 내용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나의 고질적인 신경 중심주의가 전부 타파되지는 못할 것 같다. 특히 뇌과학을 공부하고 SF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 뇌과학이 무섭게 발달해서 모든 뉴런 회로의 의미와 역할이 밝혀지는 날을 기대하지 않기는 어렵다. 그런 날이 오면 나는 매드사이언티스트처럼 사람의 도파민 회로를 조작해서 내 글을 무조건적으로 좋아하게 만들고 싶다. 그런 미래는 SF의 달콤한 상상으로 남겨놓아야겠지만. 아마 누군가의 도파민 회로를 지져놓아도, 내 글을 읽겠다는 선택에는 그의 자유가 개입할 것이다.


이 책은 철학자 셸링의 말을 인용하며 끝난다. '모든 철학의 알파요 오메가는 자유다'. 저자는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서 철학을 공부하고 책을 쓴다. 400여 쪽의 책에서 흘러갔던 수십 개의 논증과 개념과 사례를 마지막 단 한 문장에 응축하는 글솜씨라니. 나도 이런 마지막 문장을 써보고 싶다는 질투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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