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겠습니다.

시험에 실패하고 아름다운 가게에서 일합니다

by 정도겸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OMR 카드에 컴퓨터용 사인펜이 닿기도 전에 깨달았습니다. 나는 통과할 수 없다고.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이 실패였을까, 시험을 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실패였을까, 아니면 나 자체가 실패였을까요? 시험이 끝난 뒤로 가장 좋아했던 시간이 무서워졌습니다. 새벽 어스름이 푸르게 몰려오는 시간. 오래 잠을 자지 않아서 해가 모습을 감추는 때인지, 해가 뜨기 직전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도망치겠습니다. 도착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해를 가리는 구름 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는 강 너머로 가겠습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꽤 오랜 날 동안 안개 속을 걸었습니다. 뉴스에서만 보던 히키코모리가 바로 나라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헤매다 미세한 물방울 사이로 보인 것은 집 앞에 있는 중고 가게였습니다. 가게 문 앞에 적힌 전화번호가 눈앞에 자꾸 아른거렸습니다. 031에…. 031에…. 031에…. 머릿속에서만 떠다니던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습니다.

“혹시 거기서 일 도와드릴 수는 없을까요?”

뜬금없이 걸려온 전화에 상대방은 조금 당황한 듯싶었지만. 일단 와보세요, 하는 말로 통화가 끝났습니다.

점장님은 초록색 앞치마를 하고 있었습니다. 점장님께 인사를 드리는 내 목소리는 헬륨 가스를 마신 듯이 가벼웠습니다. 오래도록 다른 사람과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구멍이 부풀어서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하늘로 날아갑니다. 점장님은 내게 일을 시작하기 전에 가게를 조금 둘러보라고 하셨습니다. 커튼과 코타츠 같은 대형 잡화들이 가게 뒤쪽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깨질까 두렵도록 즐비한 컵과 그릇들도 있었습니다. 장난감 판매대에는 세기말에 반짝 인기를 누렸던 미미 인형이 늘어져 있었습니다. 먼지가 폴폴 날리고, 플라스틱을 녹여 뽑아낸 머리카락은 서로 엉켜 있습니다. 형광 분홍색에 가까운 몸체 속은 텅텅 비었을 것입니다. 그 인형들은 나만큼 가볍고, 보잘것없으며, 영원히 가게에 남아 있습니다.

처음 맡은 일은 헌 옷이 한가득 들어 있는 상자를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파란색 상자가 2단으로 쌓여 있어 내 키보다 한참 컸습니다. 상자 아래에는 바퀴가 있어 있는 힘껏 밀면 되었습니다. 온 체중을 실어보았지만 상자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밀렸습니다. 공허한 나는 상자조차 옮길 수 없나. 가벼운 좌절에 쉽게 깎여나간 것도 잠시, 나는 한참을 낑낑대다가 조금씩 요령을 깨우쳐갑니다. 이것도 작용, 반작용의 법칙일까요? 상자 무게에 짓눌리고서야 나도 무게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땀방울은 이마를 거쳐 턱으로 떨어집니다. 엄지발가락에 모든 무게를 싣고, 발뒤꿈치를 들어 상자를 밀고 나갑니다.

인형들은 여전히 가게 안에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절대 어디로 나갈 일이 없습니다. 머리카락이 불에 그슬렸기 때문입니다. 폴리에스테르는 본디 석유로부터 태어나, 불에 닿으면 액체로 돌아가며 형체를 잃습니다. 보고만 있어도 기름이 타는 듯한 매캐한 냄새가 나는 인형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가끔 나도 옷깃을 들어 내 냄새를 맡아보곤 합니다. 하루에 한 번씩 공들여 씻어도, 방 안에만 있다보면 우울한 냄새가 옮아옵니다. 그 날도 인중에 난 땀을 닦는 척, 체취를 확인하고 있는데 어떤 손님이 그 인형을 계산대에 턱 올려놓습니다. 나는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 미미 인형을 이리저리 살펴봅니다.

“머리카락에 하자가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손님의 대답을 두려워하면서도 묻습니다.

“괜찮아요. 그건 뵈지도 않을 만큼 마음에 들거든.”

손님은 들고 온 종이 가방에 미미 인형을 넣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게를 나갑니다.

도망치겠습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도망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나를 잊기 전에 돌아올 테니 너무 내 걱정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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