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엄마.

: 엄마는 엄마의 엄마에게 잊히지 않는 딸이 되었다.

by 호시탐탐

채널을 돌리다가 2015년도에 방송했던 <풍선껌>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됐다. 제목처럼 말랑말랑한 연애 이야기지만, 그 안에 알츠하이머 그러니까 치매에 걸린 엄마가 나온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엄마는 가장 가까운 기억부터 잊어갔지만 앞만 보고 달리던 때는 몰랐었던 소소한 행복들을 찾아간다.


문득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생각났다.



외할머니의 남편은 우체국에 다니는 공무원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살아생전 속만 썩이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떠났지만 외할머니에게는 아들 둘, 딸 넷.. 6명의 자식이 남아있었다.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냐만은 딸보다 아들이 귀한 시대였다. 그중 첫째 아들은 더 특별했다.

첫째라서, 아들이라서도 있지만 철없던 시절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외할머니에게 큰아들은 유독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 아픈 손가락은 자신의 인생이 뜻하지 않은 대로 흘러갈 때마다 엄마를 탓했다.

외할머니는 큰아들에 대한 애착이 지나치다는 걸 알았지만, 큰아들을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그렇게 큰아들이 나이를 먹는 동안 딸들은 엄마를 원망하게 됐다.

그럼에도 외할머니를 유독 이해한 딸은 큰딸인 우리 엄마였다.

큰딸은 엄마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엄마가 엄마이기 때문에 엄마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큰딸이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빨간 락교

비슷한 이미지를 찾아보았다. (출처: 집밥의 여왕 고여사)

엄마의 장례식이 끝났지만,

외할머니는 돌아가지 않고, 우리 집에 남았다.

엄마 없이 살아가야 할 두 손주들이 걱정되서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있었다.

엄마를 잃은 자식과

자식을 잃은 엄마가 한동안 함께 살았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락교를 고추장에 넣고 무쳤는데 무뚝뚝한 내가 그게 맛있다고 한 모양이다.

다음 날, 외할머니는 시장에서 락교를 '한 통' 사 왔다.

그리고 그 한 통을 모두 무쳐 냉장고에 넣어두셨다.


그때 외할머니가 얼마나 계시다 다시 시골로 내려가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외할머니와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외할머니가 무친 락교의 맛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그 '빨간 락교'가 생각난다.



기억을 잃어가는 병, 치매.

시골로 내려가신 외할머니는 주름뿐인 손으로 하루 종일 감자를 캤고, 그 돈은 전부 큰아들에게 줬다.

외할머니는 독한 약들을 한 움큼씩 입에 털어놓고, 매일매일 일을 하러 나갔다.

그러다가 치매가 외할머니를 덮쳤다.

외할머니는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게 됐다.


큰아들은 받기만 했기 때문인지 엄마에게 주는 법을 몰랐고,

엄마를 돌보겠다고 엄마 집을 팔아 챙긴 둘째 아들은 엄마를 버거워했다.

그리고 잘 사는 딸들에게도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그렇게 왜인지는 모르지만 가장 살기 힘들었던 막내딸이 외할머니를 돌봤다.

하지만 막내딸에게는 어린 자식이 셋이나 있었다.

막내딸은 선택을 해야 했다. 그렇게 외할머니는 요양원으로 갔다.



그럼에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은.

당시엔 나도 살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딱 한번 외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에 갔다.

외할머니는 더이상 내가 기억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원래 말랐었지만, 뼈에 가죽만 겨우 붙어있는 모습이었다.


외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제 인생을 다 바쳤던 아들들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을 원망하던 딸들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외할머니의 기억 속에 엄마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많은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먼저 떠난 자식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나 보다.

엄마는 그렇게 엄마의 엄마에게 잊히지 않는 딸이 되었다.




드라마 <풍선껌>에서의 엄마처럼

고단했던 외할머니의 삶도 기억을 잃어가면서 조금은 행복했을까?


기억이란 참 이상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선명하게 기억이 나고,

기억하고 싶은 기억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 시절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더니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기억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다 보니 기억하고 싶은 것들까지 잊어버리게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억하지 않으려고 굳이 애쓰지 말걸 그랬다.

엄마에 대한 기억도,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도 좀 더 남아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사랑해요, 외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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