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동생의 아버지가 암이 재발해서 통원치료를 받고 있는데 시골에 노인들만 있어 병원에 다니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그나마 주부인 누나가 아버지를 도와주고 있었으나 누나에게도 남편과 아이가 있어 누나가 혼자 감당하기는 역부족인 상황이 되고, 아는 동생이 일을 그만두고 내려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자 아버지가 스스로 치료를 포기했단다.
재발이라 완치는 어려운 상황에서 조금 더 살자고 자식들을 벼랑으로 내몰 수 없기 때문이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또 다른 지옥 안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버텨야하는 자식의 삶도 슬프지만... 부모는 자식의 삶의 1순위가 될 수 없음이 더 슬펐다.
나 역시 엄마의 죽음 앞에 내 생각부터 했던 그런 자식이었다. 그래서더마음이아린다.
그래서 유독 엄마가 많이 생각이 난다.
엄마는 뭐가 그리 미안했을까?
나는 한 번도 새 교복을 입은적이 없었다.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입학시기마다 아빠는 사고를 쳤고, 학교를 가야하는데 교복 살 돈조차 없었다. 다행히도학교에는 졸업한 선배들이 놓고 간 교복들이 있어 나는 늘 그 교복들을 얻어 입었다. 그래서 내 교복은 늘 컸다. 남들은 예뻐 보이려고 치마를 줄일 때 나는 치마가 흘러내리지 않기 위해서 교복을 접어 입었다. 그렇다. 우리 집은 넉넉하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빠가 3번째 보증을 섰을 때였던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한바탕 난리가 벌어져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계단에 앉아 엄마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엄마는 '우리' 때문에 버티고 있었고, 버티려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빠만 없으면 이 생활이 조금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 소리쳤다.
"제발 이혼해! 아빠 제발, 이 집에서 나가줘. 우리한테서 떨어져 줘"
엄마와 한참의 대화를 했다. 그때 두 분이 이혼하신 게 갈수록 늘어가는 빚 때문이었는지 나의 비명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엄마는 더 바빠졌다. 어쩌면 '우리'때문에 엄마의 삶은 더 고단해졌을지도 모르겠다.
혼자 벌어 자식 둘을 먹여 살려야 했음에도 엄마는 설거지, 빨래조차 딸에게 맡기지 않았다.
엄마도 장녀라 엄마의 엄마를 생각하느라 바지런히 움직였더니 그게 팔자가 되어버렸다고.
시집가면 평생 해야 하는 게 살림인데 너는 벌써부터 하지 말라고.
그래서 늦도록 일을 하고 들어온 엄마가 쓸고 닦는 게 당연했다.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계셨을 때 처음으로 죽을 끓여봤다.
고3. 그러니까 19살이 되도록 죽 하나를 끓여본 적이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내 손으로 교복을 빨아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남동생의 도시락을 싸면서 도시락을 싸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았다.
가난해서,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어서 늘 부족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엄마가 돌아가시고나서야 엄마가 나를 얼마나 귀하게 키웠는지를 알았다.
엄마딸은 엄마 없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리 귀하디 귀하게 키워놓고 엄마는 뭐가 그리 미안했을까?
남동생과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에 대해서 들었다.
"엄마는 정말 짠순이였어.
"응.
"근데 친구들하고 이야기하다 보니까 나는 안 해본 게 없더라고. (게임기의 순서를 나열하며 자기는 그 게임을 다 해봤단다.) 친구들은 중간중간 건너뛰기도 했는데 난 다 해봤더라고. 조금 지나서 중고로 사주던. 누구한테 얻어다 주던. 엄마는 갖고 싶다고 하면 그걸 어떻게든 해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