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

: 말을 참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by 호시탐탐

어제 신소영 작가님의 [잘 지내다 갑자기 침묵, 당하는 사람은 괴롭다]는 글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말을 안 하는 게 최선일까? 언젠가 일 때문에 만난 한 회사의 관리자는 자신은 회사에서 화가 나면 말을 안 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화내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삭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 말속에는 자신의 스타일에 대한 긍지가 엿보였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큰 소리로 부하 직원에게 윽박지르는 무식한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상사라는, 그때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는 시간을 갖는 건 나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 브런치 신소영 작가님 글 중에서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나도 '말 안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나는 화가 나면 말을 안 하는 사람이다.




'말을 참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남동생과 단 둘이 살았다. 그때부터 거의 5년 정도 우리는 정말 미친 듯이 싸워댔다. 몇십 년을 따로 생활해 온 남녀 사이도 아닌데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엄마가 사라지자... 온통 안 맞는 것들 뿐이었다. 그때는 정말 남동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그건 남동생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때 나는 남동생에게 '온갖 말들을 퍼부었다'

작은 일은 작은 일대로, 큰 일은 큰 일이니까... 그냥 보이는 데로, 생각나는 데로 말들을 퍼붓다 보니 어느새 흥분을 하고, 흥분을 하다 보니 말이 더 빨라지고,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그때 남동생은 잔소리로 시작해서 끝내 화를 내는 누나에게 화가 났을 거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종종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곤 했다. 서로 하지 말아야 할 말들까지 하게 되고, 그 말은 서로에게 잊히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그렇게 후회하고, 사과하고 그럼에도 또다시 반복하곤 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뭘 또 그렇게까지 내뱉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늘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퍼붓고 싶은 말들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왔을 때... 또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상처 주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 그래서 일단 '말을 참아보기로 했다' 퍼부으려던 말들을 정리하고, 걸러내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이 말이 지금 꼭 해야 하는 말인지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싸움도, 오해도, 상처 받는 일도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말을 참는 것'이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직장생활을 하다 영화 일을 시작하고, 제작팀원으로 일을 할 때는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제작부장에서 실장으로 일하면서는 '인간관계'의 영역이 대폭 확장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 시간 함께 일해 온 친구로부터 내 말투와 관련된 조언을 듣게 되었다.

"네 말투는 좋게 말하면 솔직한 건데, 솔직하게 말하면 너무 직설적이라... 네 뜻과는 다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때가 있어"


나는 '마음'이 없으면 굳이 말을 하지도 않는다. '관심'이 없으면 화도 안 낸다! 등의 말들로 변명 아닌 변명들을 쏟아냈지만 나한테 '악의'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게 누군가에게 '상처'가 됐다면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동생과의 싸움에서 얻은 최선의 방법대로 '말을 참아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말을 밖으로 쏟아내기 전에... 혹시나 내가 오해한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다른 표현 방법은 없을까?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이 말은 저 사람이 원하는 말일까?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일이 많아졌고, '말을 참는 일'도 제법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 방법은 지금까지도 꽤나 잘 먹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말을 참는 것'은 더 오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감정 갑질'을 하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전 남자 친구와는 이 문제('말 참기'와 '혼자만의 시간') 때문에 헤어졌다. 어떤 일 때문에 화가 났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화가 났고, 그래서 큰 싸움이 되기 전에 말을 참았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해야 할 말들이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남자 친구 역시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시간이 꽤 지나니 화가 났던 이유보다 말을 걸지 않는 남자 친구에게 더 화가 났다.

그렇게 두 달즈음 지났을 때, 나는 '헤어지기 위해' 그를 만났다.

"우리 헤어지자"

"왜?"


남자 친구는 진심으로 당황한 것 같았다. 당황하는 남자 친구를 보고 나 역시 당황했다. 나는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는 게 이상하지 않냐고 물었다.

"넌 화나면 말 안 하잖아. 화난 거 같으니 말을 안 걸었던 거고, 화가 풀리면 말을 하겠지 싶어 기다렸지"


그때의 나는 내가 왜 화가 났었는지는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두 달 동안 '그가 내게 연락하지 않는 이유'를 수없이 생각하며 혼자 마음을 정리한 나는 화가 풀리기를 기다렸다고 말하는 남자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복잡한 마음에 친구를 만났다.


"둘이 어쩜 그리 똑같은지... 그래도 그 사람이니까 너를 만났지. 나라면 진즉에 헤어졌어"

"이봐, 친구. 말 함부로 할래?"

"너 가끔씩 입 꾹 다물고 있으면 그게 사람을 얼마나 불편하게 하는지 알아?"

"말했잖아, 나는 말투가 예쁘지 않아서 화가 날수록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지. 그런데 나 때릴 거야! 란 말 듣고 맞으면 덜 아프냐?"

"때릴 거야?라고 말은 했지만 안 때리려고 고민하는 게 잘못이냐?"

"넌 말했으니 편하겠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네가 말을 안 해. 그럼 왜 화났지? 내가 뭘 잘못했나? 네가 말하기 전까지 계속 이 생각 저 생각 전전긍긍해야 하잖아. 그거 기분 되게 더러워"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면 되지. 왜 화났냐고 물어보면 되지!!"

"네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그거 너한테 말 걸지 말란 거잖아"

"아............"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분명 처음에는 쏟아져 나오려는 말들을 참다 보니 좋은 점들이 많았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위한 중요한 비책으로 그동안 '말 참기'를 수련해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말을 참는 것'이 상대방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싸우고 싶지 않아서, 부딪히고 싶지 않은 순간을 회피하는 핑계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내 상처만 보느라 내 행동이 '감정 갑질'이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까지 놓치고 있던 것.


'말을 안 하는 사람'을 겪은 신소영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서 다소 격한 단어일지도 모르는 <감정 폭행, 감정 갑질>이라는 단어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 그동안의 나에 대해서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말 참기'가 필요했던 것뿐인데, 상대방은 '말 참기'가 불편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생각하는 '시간'이었지만, 상대방은 '말 걸지 마'라는 암묵적인 암시처럼 느껴져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전 남자 친구가 내가 '말을 참는 시간'을 기다려주는 동안 '말을 하지 않는' 그로 인해 내가 느낀 널뛰는 감정들을 다른 사람들은 나 때문에 수없이 느꼈던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동안 무얼 놓치고 있었던 걸까?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하지만, 많은 사람들과 깊은 유대관계는 맺지는 못한다. 그래서 어릴 적 친구들 혹은 오랜 시간 가까이 한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긴다. 이 사람들과는 10년, 20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


그런데 오랜 시간 알았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쿵짝이 잘 맞았던 친구도, 척하면 척하고 내 맘을 잘 알아주던 동료도 어느 날, 어느 순간, 어느 상황에서는 내 맘 같지 않을 때가 있다. 난 그럴 때마다 그 사람과 더 오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말 참기'와 '시간'을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을 참고, 시간이 지난 뒤 만나면... 원래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이니까! 다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 방법이 나만 아는 비책인 양 인간관계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기까지 했다. 영영 안 볼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계속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면 잠시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그런데 갑자기 말을 하지 않는 나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나 때문에 그들은 서운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연락을 하고 만난다고 해서 그들이 느낀 서운함이 사라지는 건 아닌데... 나는 우리 관계는 오랫동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 역시, 갑자기 말을 안 하는 사람을 만나면 온갖 생각들로 힘들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참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말을 참는 것'의 좋은 점만 생각하느라 '말 참기'로 인해 상대방이 받는 상처를 지금까지 놓치고 있었다.


분명 '말 참기'와 '시간을 갖는 것'으로 인해서 어느 날, 어느 순간, 어느 상황에서는 위기를 모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그 방법이 옳았다고 해서 모든 날, 모든 순간, 모든 상황에서 그 방법이 옳은 건 아니다.


+ 할 말을 생각한 뒤 말하는 건 분명 중요하지만, 그 '시간'을 오래 두어서는 안 된다.

+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시간'을 갖는 건 분명 중요하지만, 회피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아직도 옳은 것인지 늘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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