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의 도구-1

통역은 기호로 하는 게 아니다.

by 도도

프롤로그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무언가를 시작한 뒤에야 부족한 점을 깨닫고 뒤늦게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대학원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입학 전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준비하지 않고 넋 놓고 있다가 대학원에 들어가서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총인원은 24명, 이 중 번역학과가 8명, 통역학과 1,2반으로 8명씩 16명이었다.

통역학과 중 순수 국내파는 단 한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현지 거주 경험이 있었다.

통역대학원에 들어올 정도이니 다들 이미 수준급의 외국어 능력은 갖추고 있었다.

나 역시 일본에서 대학원과 회사 경험이 있었고, 거기다 통번역 실무 경험도 있던 터라 그리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아니, 그렇게 혼자 착각하고 있었다.

첫 순차 통역 수업. 선생님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파악하자며 한 사람씩 통역을 해보라고 했다.

선생님이 글을 읽어주면 그걸 통역하면 되는 것이었다. 몇 문장만 통역하면 되는 거라 ‘뭐 그리 어렵겠어’ 하고 받아 적기 시작했는데…

이제까지 내가 통역하던 “말”과 선생님이 읽어주는 “글”은 단어의 밀도가 달랐다.

말은 일단 짧고 중간중간 불필요한 부분들도 많아 굳이 메모하지 않아도 문장의 뜻이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지만 글은 다르다.

한 문장에 중요한 단어들이 몇 개나 들어가 있고,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중간에 다른 방향으로 틀어지면서 예상과는 다르게 끝나기도 한다.

그러니 당연히 메모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메모를 하다 보면 거기에 집중한 나머지 읽어주는 “글”을 놓치게 되었다.

‘아 이래서 기호가 필요한 거구나. 이제 기호를 가르쳐 주시겠지.’하고 있는데 동기들은 이미 자신들의 기호를 가지고 있었다.

어리둥절했다.

분명히 이전 직장에서 만난 그 능력자 통역사가 말하길 기호는 대학원에서 배운다고 했다.

거기다 선생님은 글은 받아 적을 것이 많으니 먼저 머릿속에서 잘 기억하면서 이 기억을 되새길 수 있도록 자신만의 기호를 만들어야 한다,

노트테이킹이 잘 되어야 원문을 빠짐없이 통역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는 수업을 끝내는 게 아닌가.

어안이 벙벙하여 아직 친하지도 않은 옆 자리 동기에게 물었다.

너는 기호를 어디서 배웠냐고.

학원에서 배웠단다.

그걸 가르쳐주는 학원이 있냐고.

통대 입시 학원이 있단다.

이거 참… 난감하다.

통역대학원을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지금은 남편이 된남자 친구에게 이런 입시 학원이 있는데 다녀봐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상의한 적이 있었다.

그 말에 그는 정색을 하며 일본 대학원에서 일본어로 석사 논문을 쓰고, 일본 회사에서 일본 사람들과 일도 하고 심지어 통역 일을 2년이나 한 네가 왜 그런 학원이 필요하냐며

사설이나 칼럼들 많이 읽으면서 준비하면 된다고 했다. 그가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입시 학원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입시 학원에서 기호를 가르쳐줬다니…

심지어 우리 반 동기 중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입시 학원에 다녔다는 것이다.

이렇게 또 한참 뒤처져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만의 기호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다.

“국제”는 지구본 모양을 본떠서 동그라미에 사선으로 작대기 하나 그리고, “정부”는 부의 한자 중 일부를 따고…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 놓아도 막상 “글”을 듣고 메모를 할 때에는 내가 만들어 둔 기호가 생각나지 않아 들려오는 단어를 쓰기에 급급했다.

그러다 중요한 단어를 못 적고 놓치기라도 하면 그게 마음에 걸려 집중력을 잃고 긴장하여 결국 말이 꼬였다.

훈련이 필요했다.

내가 기사나 칼럼을 소리 내서 읽고 녹음한 후 다시 재생하면서 기호 쓰기 연습을 했다.

하지만 이럴 경우 내가 직접 읽은 글이다 보니 어느 정도 내용을 파악하게 되고 그러면서 어떤 기호를 쓰면 되겠다는 게 예측가능했다.

이 방법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동기들과 스터디도 하기 시작했다.

각자 스터디 주제에 맞게 기사나 글을 찾아와 읽어주면 나머지 다른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노트 테이킹 후 통역을 하는 것이다.

서로 시간 맞추기 어려울 때에는 녹음 파일을 공유하며 연습했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첫 해는 순차 통역만 배우기 때문에 노트 테이킹 연습이 거의 전부였다.

그런데 다른 동기들보다 한 발 늦은 탓인지 한 학기가 지나도록 기호가 손에 익지 않아 갈수록 더 긴장만 하게 되는 것 같았다.

노트 테이킹은 통역을 위한 보조수단이어야 하는데 기호 만들기와 활용하기에 집중한 나머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기호가 많으면 좋은 것 같아 자기 기호를 많이 가지고 있는 동기들을 부러워하며 밤마다 새로운 기호 늘리기에 주력했다.

그렇게 고민고민하던 차에 어떤 선생님께서 자신은 기호가 별도로 없고, 워낙 손이 빨라서 다 적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심지어 힘들 땐 메모도 안 하고 다 외운다면서.

충격이었다.

그 선생님이 업계에서도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그런 분이 기호가 없다고 하시니 무언가 반짝하는 게 보였다.

기호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닌가?

남들이 하니까 그게 좋다니까 무턱대고 따라 하고 있는 건가?

그제야 있지도 않은 틀에 나를 밀어 넣으려고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학원에 들어오기 전,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로 통역을 할 때나 회사에서 통역을 할 때 내가 어떻게 통역했는지 되새겨봤다.

그때는 기호라는 걸 몰랐을 때라 화자의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듣고 이해하고 기억해야만 통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였다.

그 본질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통역은 무엇보다 잘 듣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이후로 본질에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글로 쓰니 간단해 보이지만, 대학원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했다.

버스 안에서 이어폰을 꽂고 뉴스를 듣다가도, 밥을 먹다 번뜩 생각난 문장을 곱씹으며 허공에 대고 손가락으로 기호를 그렸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만의 방식을 완성할 수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순차 통역을 하면 내가 노트 테이킹을 하는 모습을 보고 회의 참석자나 청자들이 뭐 쓰고 있는 거냐고 질문할 때가 왕왕 있다.

내가 그 능력자 통역사에게 물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마다 ‘말을 기억하기 위한 저만의 기호’라고 답한다.

그리고 노트 테이킹이 있으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2주 정도 전에 있었던 회의 내용은 어느 정도 복기가 가능하다.

기호는 내 머릿속 기억 창고 문을 열어주는 열쇠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걸 아는 모 상무님께서는 회의가 끝난 지 한참 지난 뒤에도 이렇게 물어보신다.

“그거 그 뜻 아니었나? 메모 보면 알지?”

덕분에 종종 곤란해지기도 한다. (이어짐)


지난 2월 노트 테이킹. 노트 테이킹 때문에 점점 더 악필이 되어간다



이전 06화통역의 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