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불편한 거울
통역대학원에서는 많은 과제를 해야 한다. 발표 과제도 있고, 서평 쓰는 과제나 토론하는 과제도 있다.
물론 여기에 더해 통역과 번역 과제는 기본이다.
모두 통역사가 되기 위한 훈련이다.
통역사가 되기 위해 왜 이런 훈련을 거쳐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다 이유가 있다. 발표 과제의 경우 발표를 준비하면서 주제에 대한 배경 지식을 늘릴 수 있고,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발표를 하는 과제이기 때문에 외국어로 말하는 훈련도 된다.
이에 더해 내 발표를 들으며 동기들은 동시통역 연습도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과제인 것이다.
그 외 과제들 역시 되돌아보니 의미가 있고 훈련하는데 좋은 과제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통역사가 되는 데 가장 유익한 과제를 꼽는다면 단연 딕테이션 과제다.
말 그대로 받아쓰는 것인데 수업 시간이나 스터디 때 내가 통역한 부분을 녹음하여
그걸 받아 적고 틀린 부분을 고쳐서 다시 통역 또는 번역하는 것이다. 이 과제가 정말 힘이 든다.
한 글자 한 글자 빠짐없이 받아 적는 것이 상상 이상으로 시간이 걸리고 쉽지 않다.
하지만 정말 힘든 이유는 따로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우연히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평소 생각하던 자신의 목소리와 달라 어색하고 말투도 오글거리고 발음도 부정확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그런데 심지어 통역을 하는 목소리를 받아 적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 순간은 마치 발가벗겨진 채 광장 한가운데 내던져진 기분이다.
녹음 파일 속 나는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가 떨리기도 하고 다음 말을 내뱉기 전에 고민한답시고
‘음…’, ‘에…’ 등의 쓸데없는 추임새를 남발하며, 주술이 맞지 않는 문장을 아무렇지 않게 내던진다.
거기에 더해 목소리와 발음, 말투가 삼단 콤보로 내 귀를 가격하여
녹음 파일을 듣는 동안은 연타로 뺨이라도 맞은 듯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이 과제는 물리적으로 힘든 것 이상으로 창피함과 수치심,
그리고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면서 무슨 통역사가 된다고 이러고 있나 하는 자괴감이
과제를 하는 내내 몰려오기 때문에 어렵고 힘이 든다.
주사를 고치려면 그 모습을 영상으로 찍거나 녹음을 하여 술 깬 후에 보여주는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한다.
이 딕테이션 과제가 바로 내 모습을 교정하기 위한 훈련법이다.
내 녹음 파일을 들으면 오역과 누락, 그리고 인지 못했던 나쁜 말버릇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술 깬 후 지난밤 내 주접에 이불 밖으로 못 나오는 것처럼 녹음 파일을 듣고 나면 이불속으로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까지 흡사하다.
그만큼 나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 쉽지 않다. 하지만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주사마저 고칠 만큼 이 훈련의 효과는 크다.
나 역시 이 과제를 통해 내 나쁜 점들을 많이 고칠 수 있었다.
특히 일본어로 말을 시작할 때 또는 중간에도 “え…と(에…또)“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 과제를 통해서 거의 고쳤다.
일본 사람들은 말 꺼내기 전에 고민하거나 빈틈을 메우는 용도로 이 말을 자주 쓴다.
의식이었든 무의식이었든 나 역시 그들처럼 말하고 싶어서 이런 군더더기 말까지 따라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통역할 때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아나운서가 다음 뉴스 읽기 전에 “음…”, “그게…”, “아…” 등의 말버릇을 사용한다면 아나운서의 전문성은 실추되고
소리가 거슬려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통역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어 동시통역사가 쓴 책 중 “기자처럼 뛰고 아나운서처럼 말한다”라는 책처럼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통역사는 아나운서와 같은 전달력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필러 워드(Filler word)는 과감히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말버릇이라는 게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루 이틀에 고쳐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녹음을 통해 이게 얼마나 거슬리고 불필요한지 뼈저리게 느낀다면 고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한국어와 일본어에서 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배웠다.
예를 들어 “비가 온다(단순 사실)”와 “비는 온다(기대와 다름, 대비 느낌)”는
조사가 “가”에서 “는”으로 바뀐 것뿐인데도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이 조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면 통역 시 중요한 정보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사소해 보이는 조사가 아주 큰 차이를 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말한 걸 녹음하고 그걸 딕테이션 한 후 다시 원문과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 확인하고 수정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조사의 중요성은 그것만으로도 논문이 수백 편, 수천 편 나올 정도라 더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만, 특히 동시통역 때 통감한다.
연사의 말을 따라가며 통역하고 있는데 중간에 내용이 달라지거나, 발화자 자체가 조사를 잘못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 이미 뱉은 조사는 바꿀 수가 없으니 술어를 수동태 또는 능동태 형태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발화자가 “이 정책은… 정부가 내년에 시행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통역사가 “이 정책은” 까지 벌써 통역을 해버린 상황에서
발화자의 뒷말을 듣고 “내년에 시행될 예정입니다”라고 자연스럽게 조사와 술어의 형태를 고쳐주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교정하고 훈련할 때 딕테이션 과제만큼 좋은 것이 없다.
스스로를 점검하고 교정하는 것은 비단 대학원 시절에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필드에 나와서까지 딕테이션을 하기에는 시간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무리가 되겠지만
자신의 통역을 녹음하여 듣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좋은 훈련법이다.
여전히 녹음된 내 목소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그라들며,
도대체 왜 그때 그 말을 잘 살릴 수 없었는지 후회가 막심한 파일들이 산처럼 쌓여 있지만 그래도 이걸 해야 한다.
그래야 나를 제대로 보고 내가 고칠 수 있다.
이러니 통역사에게 있어 녹음기는 중요한 도구가 아닐 수 없다.
나를 가장 불편하게 하지만, 동시에 가장 정직하게 비춰주는 도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요즘에야 녹음기 없이도 스마트 폰 하나면 어디서든 녹음을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그렇게 따지면 딕테이션까지 다 해주는 시대가 됐으니 요즘 공부하는 친구들은 받아쓰느라 새벽 2, 3시까지 고생하는 일도 없어졌으려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