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의 소심한 고민
지금 회사는 3월 말에 개인별 성과가 발표되고 그 결과에 따라 연봉 인상률이 정해진다. 이외에도 우수인재제도가 있어 우수인재로 선정되면 별도 교육도 받고 부사장이 직접 향후 미래에 대해 면담도 하고, 소정의 인센티브까지 받을 수 있다. 또한 임원 후보자들을 미리 선정하여 일정 기간 교육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이뿐 아니다. 영업, 개발, 생산, 지원 등 각 업무 분야별로 큰 성과를 낸 사람들에 대해 분기별, 연도별 포상도 한다. 이러한 직원 독려나 육성을 위한 활동들은 시기나 명칭이 조금씩 다를 뿐 다른 회사에서도 비슷하게 운영될 것이다.
나는 통역사라는 직업 상 개인별 성과 결정부터 인재 선정, 포상자 선정 회의까지 모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 어떠한 사람을 원하는지, 현재 누가 인정받고 있는지 또는 반대의 경우까지 속속들이 알게 된다. 초반에는 남들은 모르는 나만 아는 정보가 있는 것 같아 뭔가 우쭐하기도 하고 내가 아는 사람이 후보자 리스트에 있을 때면 내 일처럼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런 회의에 가능하면 안 들어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회사에 비밀이란 없지만, 남들 모르는 비밀을 내가 알고 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걸 알고 있다고 해서 나에게 하등의 도움도 안 된다. 때로는 누군가는 저렇게 인정받고, 성장하고 있는데 나만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정체되어 있는 건가라고 생각될 때도 있다.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통역은 본질적으로 지원 업무라 성과를 수치화하기 어렵다는 것을. 하지만 나 역시 중요한 업무를 하고 있고 고생하며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그 어떠한 곳에서도 내 이름이 거론되지 않을 때면 허탈함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처음부터 몰랐다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특히 나와 가장 오래 일하고 가까이 일하는 일본인 부사장이 내 미래나 업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느껴질 때 그 허탈함은 배가 된다. 이 분은 부하직원의 커리어 패스, 미래에 대해 매우 관심이 높고 많은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부하직원들에게 자신의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직원의 공적/사적 상황이나 능력을 두루 살펴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부하직원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사임에 틀림없다. 특히 우수인재 면담 시에는 도대체 이 직원을 언제 봤다고 이런 고민까지 했을까 싶을 때도 있다. 그러다 문득, ‘8년을 동고동락하며 그의 입이 되고 귀가 되었던 나에 대해서, 내 미래에 대해서는 저렇게까지 고민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내가 만약 통역 업무가 아닌 주요 핵심 업무를 담당했다면 그의 나에 대한 기대치가 달랐을까라는 생각도 떨치기가 힘들다.
이렇게 통역이라는 업무는 승진이나 역할 확장이 쉽지 않다. 물론 통역 일을 하다가 다른 업무에 두각을 보이거나 관심을 가지게 되어 업무 변경 후 성공하는 케이스들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통역 업무 대신 새로운 업무로 방향을 틀어서 성공한 것이지 통역 업무만으로 회사에서 인정받고, 포상받으며 임원까지 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통역 업무를 바탕으로 새로운 분야에서 회사에 공헌하겠다고 제안했다고 치자. 과연 회사 입장에서는 환영할만한 일일까? 새 업무를 위한 교육으로 추가 시간(곧 비용)이 발생하고 업무 공백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우리 회사에서 후배 통역사가 통역 외 업무로 변경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한 적이 있다. 후배 통역사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회사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니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도 없었다.
모든 통역사들이 이러한 성장을 원치 않을 수도 있다. 스페셜리스트로서 자신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꾸준히 그리고 안정적으로 일하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비단 통역사에 국한된 이야기만도 아니다. 결국 업무의 특성과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욕심내는 내가 문제인 것인가.
어렸을 때 나는 무대 중심에 서길 원했었다. 중심에서 조금이라도 비껴나가거나 뒤쳐지면 참지를 못했고 불안했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 조금씩 나이가 들고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이목을 끄는 것만이 행복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다 통역과 같은 백 스테이지 업무를 하면서 주인공이 아닌 내가 돋보여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억제할 수 있게도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 모습은 사회적 학습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지 타고난 기질이 아니다. 그러니 내 천성이 주책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이겠지.
하지만 회사라는 조직에서 자신의 업무로 인정받고 이에 대해 응당한 대우를 받고 싶은 게 나의 인정욕구 때문만일까? 얼마 전 한국의 영화제가 크게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영화 제작에 기여한 많은 스태프들의 공로는 뒤로 한채 화제성만을 갈구한 나머지 유명 배우들만의 축제로 끝났다고 말이다. 영화가 어디 배우들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이 있기에 완성된다. 회사도 마찬가지이다. 몇 백억 씩 수주하고 업계 최초로 신상품을 개발한 사람들이 회사의 눈부신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회사의 성장과 성공은 그들 외에도 눈에 띄지는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한 번쯤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어도 되는 것이 아닐까.
결국 나도 인정받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남들처럼 포상도 받고 우수인재로 선정도 되면서 몇 단계씩 겅충겅충 건너뛰며 승진하고 싶다는 거다. 나라고 못할 쏘냐.
인하우스 통역사로 일하는 한 선배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하다가도 한편으로 끊임없이 관심을 바라는 나는 연옥에 갇혀있다”고. 나 같이 고민하는 사람이 또 있구나라며 마음에 큰 위안을 얻었다. 아마 나도, 그 선배도 스스로가 만든 이 연옥 속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연옥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서 서럽다가도 남의 얕은 칭찬 한 마디에 서러움이 눈 녹듯 사라지고, 또 어느 순간에 남의 말이 뭐가 중하냐며 스스로 찾은 위안과 안정감에 벅차오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는 것이겠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