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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 Nov 08. 2022

영화의 주인공처럼

과학과 에세이

미래를 애써 알려하지 않아도 된다. 불안이 드리울 때면 미래를 알려고 한다. 미리 알아두면 걱정을 상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감에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웬만큼 경험해 봤듯, 미래란 건 알려고 들수록 되려 불안이 커져가는 존재다. 기를 써본들 어차피 알 수 없단 걸 알기 때문이다. 자연의 비밀을 하나씩 파헤쳐가는 사피엔스라지만, 미래에 관한 일만큼은 여전히 무지할 뿐이다. 그러니 그저 나이에 맞는 현재의 걱정만큼만을 감당하면 될 일이다. 확정조차 안 된 먼 미래 속의 불안마저 으레 앞서 당겨올 이유가 전혀 없다.


영화처럼 시작부터 결말이 미리 정해진 것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영화의 결론부터 보는 사람이 흔할까. 3차원 존재는 2차원 화면의 과거와 지금, 미래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직전엔 뭘 했으며 이후엔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인다. 화면 한 켠에 기다리는 괴수를 게임 캐릭터의 시선으론 보지 못 할지언정, 화면 밖 우리 시야엔 모든 게 훤하다. 그러니 때론 4차원의 감각을 빌려 내가 속한 3차원을 선행하고픈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우주는 4차원을 넘어 11차원 혹은 그 이상으로 이어진다는 관측도 있으니까.


그런데 막상 거시세계 속 4차원 존재가 되어 3차원의 모든 걸 보고 온다면 마음이 놓일까. 설령 4차원의 전지적인 시점을 빌려온다 한들 그보다 더 거대하게 뻗는 5차원의 존재감에, 혹은 그 이상의 존재 앞에서 또다시 한없이 무지한 존재가 되고 마는 건데. 기를 써서 하나를 알게 된다고 해서 자기 앞을 모르는 건 결국엔 별반 다를 것 없을 테다. 그러니 어차피 맞이해야 할 모름의 연속 앞에서, 기어이 애쓸 것도 없고 기어코 걱정할 필요도 없다.


영화 속에 몰입해 러닝타임 동안 주인공을 응원했듯이, 현재를 사는 주역으로서 생애 주기 동안 스스로를 응원한다. 다가올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해서 현재를 살아갈 의미마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처럼 닥친 일을 다단이 헤쳐 나가며 홀연히 결말로 다가갈 뿐이다. 각자의 드라마에선 그렇게 저마다의 각본대로 진행되어 가는 중이다. 그러니 당시에는 몰랐어도 지나고 보면 매 순간이 극적으로 느껴지던 이유이기도 하고. 극적인 삶을 사는 법, 그건 늘 그랬듯이 한 치 앞도 모를 때 가능한 일이었다.


위기와 갈등을 겪지 않던 영화가 어디 있었나. 그러니 미래에 대한 선문답을 되뇔 시간에, 도리어 4차원의 관객이 되어 응원을 건네줘 본다. 3차원의 관객으로서 2차원의 영화 등장인물을 응원했듯 말이다. 숱한 반전 앞에 고배도 마셨지만 바라던 결론에 닿았던 극 중 주연처럼, 클리셰를 이겨내고 피날레로 향하던 영화의 주역 마냥 살아가던 우리들에겐, 아깝지 않을 찬사일 테다. 우린 모두, 지금도 극적인 배경 아래서 당장 일도 모른 채 각자의 역할을 맡아내고 있던 셈이다. 한 치 앞도 모르지만, 영화는 지금도 완성되어 가는 중이다. 영화는 결말을 모르고 봐야 재밌는 법이니까, 걱정의 시간을 아껴 현재의 씬(scene)을 즐겨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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