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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 Oct 30. 2022

바쁜 날, 느린 반응, 천천한 마무리

과학과 에세이

눈을 뜨면 모든 게 빨라진다. 바삐 지하철에 올라 급하게 갈아탄다. 걸음은 자연스레 빨라지고 호흡은 짧아진다. 정신 차릴 작은 틈새 없이 일은 시작된다. 온몸에 뻣뻣한 경직감이 들고 긴장감이 차차 퍼져간다. 밭아진 호흡에 발맞춰 시간도 덩달아 가쁘게 굴러간다. 번잡한 일과를 뒤로하고 도착한 집에선 하루의 기억이 희미해지곤 한다. 피곤으로 몸과 마음이 축 처진다. 씻기 전 얼굴 들어 쳐다본 거울에 그제야 알아챈다. 눈앞에 비친 입꼬리 끝이 아래로 축 가라앉아 있었단 걸.


그럴 때면 잠에 들 준비를 끝마치고 겉옷만 걸쳐 잠시 나간다. 시끄러운 집 앞을 뒤로하고 조용한 집 뒤편 이름 모를 언덕을 숨차게 오른다. 한 술 한 술 꼭꼭 씹어먹었던 어느 날의 저녁처럼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딛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눌러 디뎌간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땅의 단단함을 의식한다. 느린 걸음에 오늘 하루의 기분이, 오늘 하루의 마음이 결정될 걸 아니까 하루가 저물어가는 이 순간을 소중히 걸어 나간다. 하루를 그렇게 마무리한다. 먼지 쌓인 표면을 살균된 행주로 닦아주듯이 몸에 덕지덕지 붙은 응어리들을 차근차근 털어낸다.


반응물이 여럿 뒤섞이면 앞다퉈 반응을 경쟁한다. 한바탕 서로의 다툼이 끝나고 나면 지긋이 뒤를 따라오던 가장 느린 반응이 있다. 그 반응마저 끝나고 나서야 전체 반응이 마침내 종료된다. 언뜻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모든 반응의 속도는 빠른 반응물의 속도가 아닌 제일 느린 반응물이 결정한다. 꼴찌 주자가 결승선에 도착해야 레이스가 마무리되는 것처럼 말이다.


온종일 바삐 걸어 다녀 발이 저릿하지만, 그 덕으로 느린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바쁜 날일수록 오히려 느린 반응으로, 천천히 끝을 맺는다. 폐부 깊숙이 밤공기를 들이킨다. 공들여 느리게 마무리를 짓는다. 오늘을 기억하게 하는 건 바빴던 하루의 종일이 아닌 천천한 찰나의 마무리였음을 기억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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