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아담과 이브가 보낸 어느 날(part. 2)
농업혁명 전에 지구에 살고 있던 5백만~8백만 명의 수렵채집인은 수천 개의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를 지닌 수천 개의 개별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리고 이것은 인지혁명의 주된 유산이라고 할 수 있었다. 픽션이 등장한 덕분에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동일한 생태적 조건하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매우 다른 상상의 실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서로 다른 상상의 실체들은 서로 다른 규범과 가치로 모습을 드러냈다. (pp. 76-77)
> 세계지도에서 대한민국을 찾기는 꽤 어렵다. 땅덩어리가 좁은 편이기 때문이다. 땅이 넓기로 유명한 러시아, 캐나다, 미국, 중국 같은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대한민국의 땅 넓이는 수십 분의 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나 작은 나라임에도 동네마다 지역마다 문화가 많이 다르다.
>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 사투리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아 생기는 혼란과 오해를 소재로 삼아 만들어지는 개그 코너들이 많이 만들어질 정도이다. 지역 특색이 드러나는 음식 문화를 가지고 만든 방송 프로그램들도 있다. 지역마다 기후가 다르고 구할 수 있는 재료도 달라서, 그에 따라 집도 지역마다 다르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 이 좁은 나라에는 심지어 지역감정이라는 것도 있다. 고향이 같은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패거리를 이룬다. 이 패거리의 사람들은 고향이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따돌리기도 한다. 나아가서 정부의 예산을 자기의 패거리와 가까운 지역에 몰아주거나, 다른 어떤 지역 출신 사람들을 공직의 중요한 자리에 임명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면 자기들끼리 더 끈끈하다고 느끼면서 마음이 편해지나보다. 이렇게 싸우고 으르렁대던 사람들도 월드컵이나 올림픽 때는 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자기네 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을 응원하니, 이 지역감정이라는 것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다.
> 지금은 교통과 통신이 많이 발달해서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소식을 이전보다 훨씬 많이, 자주 주고받을 수 있다. 그런데도 지역감정이라는 패거리 문화는 끈덕지게 남아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아마 구석기 시대의 사피엔스들은 이런 패거리 문화를 더 심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은 다른 무리에 있는 사람을 평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무리의 사람들과 아주 끈끈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각각의 무리들은 자기들 나름의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서 후손들에게 전했을 것이다. 만약 다른 무리의 사람들을 만난다면 말이 하나도 안 통해서 답답해 하거나 심하면 전쟁을 벌이지 않았을까.
> 지금 지구에 살고 있는 호모사피엔스들은 유전적으로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집단마다, 지역마다 매우 다르다. 구석기 시절의 호모사피엔스와 지금의 호모사피엔스의 유전적 차이도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럼에도 구석기의 호모사피엔스와 지금의 호모사피엔스가 사는 모습은 아주 많이 다르다. 어쩌면 비슷한 점을 찾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니 호모사피엔스의 삶이 동네마다 달라지는 이유를 생물학적 관점으로만 봐서는 건질 게 별로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문화적 관점에서 보아야 사피엔스의 삶의 복잡한 꽈배기를 한 올 한 올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 호모사피엔스의 삶을 문화적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그 사피엔스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허구적 실체’를 파헤쳐본다는 뜻이다. 사피엔스가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 위계질서를 세우는 방식, 아름다움과 추함을 가르는 기준, 공동체를 운영하는 방식,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 같은 것들은 모두 자신이 허구적 실체에 따라 정해진다. 그 허구적 실체는 조상으로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전해진 것일 수도 있고, 같은 시대를 사는 사피엔스들이 중요한 사건을 함께 겪으면서 새롭게 만들어질 수도 있다.
[요컨대, 현대 수렵채집인에 대한 인류학적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고대 수렵채집인들에게 어떤 가능성들이 있었을지 이해할 수 있지만, 고대엔 그 가능성의 지평이 훨씬 더 넓었고 그 대부분은 우리 시야에서 가려져 있다. 호모 사피엔스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은 주된 쟁점을 놓치고 있다. 인지혁명 이래 사피엔스에게는 단 하나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은 가능성 가운데 어떤 것을 문화적으로 선택하느냐라는 문제가 있었을 뿐이다.
'가능성의 지평'이란 특정 사회에게 열려 있는 신념과 관행, 경험의 스펙트럼 전체를 말한다. 이는 나름의 생태적, 기술적, 문화적 한계를 전제로 한다. 하나의 사회나 개인이 각자의 가능성의 지평 안에서 실제로 탐색하는 범위는 매우 좁게 마련이다.] (pp. 77-78)
> 자기가 직접 게임을 할 때보다 남이 하는 걸 옆에서 보면서 훈수를 둘 때, 판을 훨씬 폭넓게 읽고 수를 더 멀리 내다보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직접 게임을 하면 여러가지 이해관계, 욕심, 감정, 기억 같은 것들이 시야를 좁게 만든다. 자신의 일로서 받아들이고 몰입하게 되면 평정심을 잃고 흔들리게 되는 것 같다. 만약 마음을 흔드는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게임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들을 차분하게 살필 수 있다면 좀 더 고수에 가까워질 것이다.
> 게임만 해도 그런데, 역사적 갈림길에 서서 큰 선택을 해야 했던 사람들은 더 그랬을 것이다. 하나의 사회나 개인이 각자의 가능성의 지평 안에서 실제로 볼 수 있는 범위는 매우 좁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옛날 사람들이 A라는 길로 가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B라는 길로 잘못 들어섰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로서는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가능성의 지평이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 유발 하라리 교수님이 뒤에 설명하겠지만, 말 나온 김에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 우리 앞에는 수십, 수백 가지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예를 들어, COVID-19는 우리 삶을 정말 많이 바꿔놓았다. COVID-19 때문에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가능성들을 자유롭게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가능성의 개수가 늘어나는 만큼 우리는 미래를 더 탄탄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그 가능성들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입시, 진로, 건강 등과 같은 중요한 이해관계들이 복잡하게 엮여 있어서 객관적으로 사태를 바라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사회가 변화할 때 어떤 게 중요한 변수가 되는지, 여태까지 어떤 경우의 수들이 있었는지, 당시의 사람들이 그 많은 경우의 수들 중에 한가지를 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폭넓게 공부한다는 것이다. 이런 훈련을 하고 나면, 그 많은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지금의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좋은지 좀 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