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패럴리, <그린북>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휩쓸며 4관왕을 달성했다. 영화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번 기회에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수상작들과 후보작들을 쭉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그러면 <기생충>이라는 작품이 세계 무대에서 어느 정도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는지, 나아가서 어떤 영화가 '잘 만든 영화'라고 할 만한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제91회 아카데미 작품상은 피터 패럴리 감독의 <그린북>이 받았다. 사실 이때의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수상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다. <더 페이버릿 : 왕의 여자>나 <로마> 같은 작품들이 <그린북>보다 작품성이 더 뛰어나다고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피터 패럴리의 필모그래피는 <덤 앤 더머> 같은 코미디 영화나 <매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같은 로맨틱 코미디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그가 이전에 만든 작품들 중에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오른 것은 하나도 없다. 흥행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작품성으로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을 좋아한다. 그가 만든 <로마>가 상을 못 받아서 아쉽긴 하지만, <그린북> 또한 작품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수준 높은 윤리학을 알기 쉬운 이야기로 잘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린북'은 본래 흑인이 여행할 때 갈 수 있는 식당, 숙박업소 등을 정리해둔 책 이름이라고 한다. 백인들에게는 이런 책이 필요 없었다. 그들은 원하는 곳 어디든 마음 편히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만 봐도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줄거리만 보면 <왕자와 거지>를 변형한 브로맨스 이야기이다. 다만 <그린북>에 나오는 두 주인공의 관계는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왕자와 거지의 구도와 사뭇 다르다. 흑인이 인종차별당하는 사회인데, 흑인이 왕자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돈 셜리는 1960년대 흑인으로서는 드물게 고급 교육을 받았다.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로서 이름을 떨치고, 상류층 백인들과 친하게 지낸다. 인종만 보면 소수자에 들어가지만, 문화적으로는 주류인 백인에 가깝다. 셜리는 미국 남부로 투어 공연을 떠나면서 백인 한 명을 운전수이자 보디가드로 고용한다. 토니 발레롱가는 백인이지만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이다. 밤거리에서 일하고, 달마다 집세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살림이 빠듯하다. 인종만 보면 다수자이지만, 경제적으로는 하층민에 속한다. 토니는 흑인 가수들의 음악을 셜리보다 더 잘 안다.
두 사람은 남쪽으로 갈수록 인종 차별의 벽이 높아지는 걸 느낀다. 셜리는 백인의 집에서는 화장실을 쓰지 못한다. 양복 가게에서는 백인에게만 옷을 판다. 흑인들은 밤에 돌아다니지도 못한다. 자신이 공연의 주인공임에도 공연이 진행되는 호텔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도 없다. 이 모든 고생은 셜리가 스스로 원한 일이다. 그는 피부색만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문화를 온 힘을 다해 바꾸고 싶었다. 셜리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 와중에 셜리가 오랫동안 감춰왔던 비밀이 하나 밝혀진다. 셜리는 성소수자였다. 그는 평생 이 주제를 놓고 씨름해왔을 것이다. 셜리는 결국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물음을 던지고 말았다.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으면, 나는 대체 무엇인가, 하고. 사람은 어떤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아야 마음이 편한 것 같다. 겉으로만 봤을 때 그는 흑인이고 남성이고 중산층이지만 이 셋 중 어느 집단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궁금한 게 몇 가지 생겼다. 왜 셜리가 살았던 세상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떤 테두리 안에 잡아넣으려고만 할까. 셜리로 하여금 울타리 안에 속하지 않았다는 불안감에 떨며 눈치 보게 만들었을까. 왜 셜리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서 살지 못하게 한 걸까.
그럼에도 셜리는 '존엄함(dignity)'을 지키기 위해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그는 마지막 공연장에서 푸대접을 받고는 건물을 박차고 나온다. 마침내 그는 백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흑인이 되겠다는 목표까지도 버린다. 드디어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지만, 그런 나로서, 나답게 살아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다.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다. 흑인 전용 식당에서 마지막 연주를 하는 그의 얼굴은 한 점 그림자도 없이 밝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