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방>의 방을 처음 다 읽었을 때,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지금도 울프의 글을 떠올리면 다시 그 글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학부모 간담회하러 가던 지하철 안에서 6장 끝부분을 읽었다. 간담회를 하고 집에 어떻게 왔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몸살이 난 것처럼 으슬으슬했다. 그 날은 비가 많이 왔다. 그렇지만 베트남 여행에 갈 옷을 준비하기 위해 빨래를 했다. 집에서는 빨래가 마르지 않을 것 같아서 근처에 있는 동전 세탁방에 건조기를 쓰러 갔다. 건조기가 돌아가는 동안 <자기만의 방>을 다시 읽기 위해 챙겨갔다. 그런데 1층 현관문 출입 카드를 집에 놓고 왔다. 다시 집 앞으로 가서 누군가가 나오거나 들어갈 때를 멍하게 기다렸다. 비가 많이 내렸다.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계속 나에게 질문했다. 왜 나는 멍청하게도 카드를 두고 내려왔을까. 혹시 저 사람이 이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빨리 울프 책 다시 읽어보고 싶다. 울프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글을 그렇게 썼을까. 내가 이렇게 자극을 받은 건 혹시 나도 그런 글을 써보고 싶어서일까.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도 않네. 누가 내려오지도 않나보다. '여성과 픽션'을 주제로 쓴 글인데 왜 내가 이렇게도 크게 감동을 받았을까. 내가 여성이어서이거나, 울프가 여성만을 대상으로 글을 쓴 게 아니어서이거나겠지. 하지만 내 손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일단 베껴쓰기라도 한 번 해볼까. 그럼 뭐든 느껴지지 않을까.
책을 다시 읽으면서 중요하다 싶은 글줄들을 골라서 옮겨 적었다. 모든 글귀가 다 중요해서 뺄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 중에 몇 개를 골라야 해서 힘들었다. 그런데 옮겨 쓰다 보니 날마다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바가 달랐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은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을 골랐다. 어느 날은 남성에 의해, 남성에 비해 차별받고 억압받는 여성들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을 옮겼다. 어느 날은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에서 벗어나 감춰져 있던 것들을 드러내려고 하는 부분을 골랐다. 또 어느 날은 울프가 문학 작품을 읽고 감상을 남긴 부분을 골랐다. 날마다 내가 끌리는 부분이 다른데, 어떤 것에 끌리든 울프의 글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울프의 글에는 이 모든 게 다 담겨 있었다. 왜 그는 이 중 어느 하나에 집중해서 글을 쓰지 않았을까.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느끼게 만들면서까지 그가 이런 글쓰기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울프의 글쓰기 방법에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너무 쉽게 이름 붙인다. 사실 나도 울프의 글을 읽고 분석하고 개념화하라고 하면 할 말은 많다. 예를 들어, <자기만의 방>의 첫 문장은 '하지만(but)'이라는 낱말로 시작한다. 다짜고짜 '하지만'이라니, 당황스럽다. 이것은 울프 자신이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이 고민해왔는지 알려주기 위해 사용한 기법이다. <자기만의 방>이라는 글이 울프의 삶과 동떨어져서 갑자기 짠 하고 쓰여진 게 아니라 울프가 한참 고민하고 나서 글을 썼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면 울프는 이미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여성이 각자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고 결론지었는데,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하려고 글을 조금 남다르게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방>의 모든 낱말, 모든 글줄에 이런 해석을 갖다 붙일 수 있다. <자기만의 방>을 읽은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수백, 수천 가지의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각각의 해석들은 진실을 어느 정도 품고 있지만 정답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그저 사람들은 자신의 해석을 정답이라고 여길 뿐이다. <자기만의 방>을 찬찬히 읽어보면, 울프가 누군가의 됨됨이나 삶의 방식을 쉽게 단정짓고, 평가하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여성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공격하는 남성들에 대해 분노한다. 그렇지만 울프는 그 사람들 각각의 인격을 공격하고 무시하기보다는 그 남성이 여성을 자신보다 낮은 존재로 여기게 된 이유를 생각해본다. 여성을 공격하는 남성들 개개인만 봤을 때는 그들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것 같지만, 한 단계 더 깊게 생각하면 남성들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어떤 단계에서는 정답이라고 여겨지는 생각도 다른 곳에 서서 바라보면 정답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울프는 남성 개개인의 인격을 함부로 모독하지 않는다. 다만 정답일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들을 찾아 글로 적어내려 했을 뿐이다. 울프의 글쓰기 방법을 '의식의 흐름'이라고 틀지어버리면 오히려 울프의 글이 품고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잘라내는 것만 같다. 울프가 남에게 절대 하지 않으려던 짓을 울프에게 하는 셈이다.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여성이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고 있고, 사회적으로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 써야 했을 것이다. 픽션이 무엇인지, 언제 만들어졌는지, 누가 썼는지 써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은 딱 나눠 떨어지지 않는다. 픽션에 비치는 여성의 모습이 있다. 여성이 픽션을 쓴다. 픽션을 쓰는 사람들로 하여금 여성을 그렇게 묘사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여성들이 픽션을 쓰면서 드러내고 싶었던 속마음이 있다. 이렇게 주고 받기를 계속 하다 보면 결국 울프는 자기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엇을 것이다. 자신이 여성이면서 픽션을 쓰는 사람이면서 앞서의 복잡한 주고 받기를 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울프는 자기 안에 온갖 것들이 다 들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몇 마디로 딱 떨어지거나 한 가지의 주제가 정답인 것처럼 글을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남에게 자신의 글이 어떻게 읽힐지는 두 번째 문제였을 것 같다. 그저 자신이 스스로에게 떳떳한 글을 썼는지가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자기소개서를 쓰기 어려운 이유도 이와 비슷하지 싶다. 내 속에 있는 이런 저런 모습들이 다 나의 일부분이고 그 중의 한 가지만 골라서 써야 한다. 그런데 그 한 가지를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보기 좋게 포장해야 한다.
나는 <자기만의 방>을 읽고, 글 한 편에 나 자신의 이야기만 녹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나의 눈길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해 있는 시간이 더 많다. 다른 사람의 삶을 평가하는 걸 즐긴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평가에 전전긍긍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면 남이 해석한 나를 진짜 나의 모습이라고 믿고, 내가 해석한 남을 그의 진짜 모습이라 믿게 된다. 울프는 끊임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글을 쓰라고 한다. 이 두 가지는 분명 가까이 붙어 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남의 해석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아야 한다. 나의 해석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그러자면 남의 해석을 내가 다시 해석해보아야 하고, 나의 해석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다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의 생각은 멈춰 있지 않고 끊임없이 묻고 답하기를 주고받으며 바뀌어간다. 자기만의 방은 언제나 똑같은 곳에 똑같은 모양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