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자기만의 방>을 읽은 여운이 한 달이 넘게 가시질 않는다. 그런 와중에 <댈러웨이 부인>을 읽게 되었다. 마감에 쫓겨 급하게 읽었다. 소설의 세계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주요 인물들에게 적응하고 나니까 책이 점점 빨리 읽혔다. 다 읽고 나서야 불과 하루짜리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다. 일상은 매일 똑같고 지루하다고 느껴지지만, 사실 하루하루는 조금씩 다르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서 같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생각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매일 글로 쓴다면 아주 자세하고 복잡한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몇 사람 어치만 모아도 이렇게 정신없는 소설이 될 것이다.
제목만 보고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인생의 단맛 쓴맛 짠맛 매운맛 다 보는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댈러웨이 부인> 전체를 꿰뚫는 '중심 서사' 같은 건 없다. 그러니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우듯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플롯' 같은 걸 찾기도 힘들다. 등장인물 각자 나름의 처지와 성격이 있고, 그에 따라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서술자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그 이야기들을 한 번씩 비춰줄 뿐이다. 그 리듬에 적응하고 나니 소설이 읽을 만해졌다.
인물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떳떳한지 스스로 비춰볼 내면의 거울이 없다. 그들은 그저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가면을 쓰고 사람들 앞에 나설 뿐이다. A라는 인물의 이야기는 B라는 인물의 렌즈에 전혀 다른 상으로 비친다. 루크레치아가 남편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이 피터 월시에게는 젊은 한 때의 고민처럼 보인다거나 휴 휘트브레드가 목숨처럼 여기는 관습과 격식이 샐리에게는 쓸모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거나 한다. A는 욕심이나 성격이나 처지 때문에 꼬여 있다. B의 렌즈는 금이 갔거나 찌그러져 있거나 색이 바랬다. 울프는 B의 렌즈에 비친 상을 글로 그려서(C) 우리에게(D) 보여준다. 우리는 A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세 번이나 반사된 다음에 마주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끗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저 A가 가진 진실의 일부만을 아주 조금 엿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도 나에게 비친 일그러진 상에서 출발해서 A의 마음을 짐작해보는 재미가 있다.
<댈러웨이 부인>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드 울프의 마음의 어떤 부분을 대표하는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 같은 클라리사는 이성에게 많은 인기를 얻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사교계에서 인정받는 현모양처가 되고 싶은 울프의 마음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사랑에 끌리는 갈대 같은 마음에 피터 월시를 만들었다. 셉티머스는 어릴 적에 받은 트라우마에 괴로워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그런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남편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셉티머스 옆에 루크레치아를 두었다. 샐리는 관습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을 상징한다. 닥터 홈스와 브래드쇼에게서는 규범을 강요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함부로 자기 틀에 끼워 맞추려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울프의 마음이 느껴진다. 여성의 참정권이 제한되어 있지만 울프는 그럼에도 정치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 그 마음에 레이디 브루턴 같은 인물을 등장시켰다. 휴 휘트브레드를 보면 울프는 상류 계층의 삶에 끼고 싶은 허영도 품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울프의 마음속에는 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 이들은 매일 같이 <댈러웨이 부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파티는 이 모든 인물들이 자기를 뽐내면서도 서로를 비웃는 모습을 그려내기에 더없이 좋은 장치다.
이 많은 인물들 중에 셉티머스와 루크레치아 부부만이 파티에 끼지 못했다. 셉티머스는 전쟁에 나갔다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겪고 있는 듯하다. 그는 스스로를 깨달은 자라고 생각하는 한편, 죽은 동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한다. 닥터 홈스와 브래드쇼는 관습과 전통, '보통의 사고방식'을 상징한다. 그들은 셉티머스의 상태를 그대로 받아주기보다는 취미 생활을 즐기라고 강요하거나 균형 감각을 되찾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격리되라고 강요한다. 셉티머스는 결국 그들을 피해 창 밖으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셉티머스가 자살했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멀쩡했다. 루크레치아는 실로 오랜만에 셉티머스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참이었다.
클라리사는 온갖 거짓과 허세로 가득 찬 파티 한가운데에서 이 소식을 듣는다. 클라리사는 사고 소식을 들으면 몸이 그 일을 고스란히 겪곤 한다. 사실 우리도 누군가의 고통을 전해 들으면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일처럼 공감할 때가 있다. 클라리사는 순간적으로 그 공감능력을 발휘해서 셉티머스가 몸을 던지면서 느꼈을 고통을 고스란히 옮겨 받는다. 셉티머스는 관습과 전통의 굴레에 삶의 중심을 내어주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그에 클라리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 단 한 가지 사실은 '날마다 조금씩 부패와 거짓과 잡담 속에 녹아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는다. 나는 이 장면에서 클라리사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자유쯤은 가져야겠다고, 남의 눈치를 보며 속물로 사느니 차라리 떳떳하게 죽는 게 낫겠다고 다짐했다고 느꼈다. 클라리사가 피터 월시 앞에 서는 장면에서 소설이 끝나는 걸 보면 클라리사는 자신의 다짐을 곧바로 실천하기로 다짐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