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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어썸머 Sep 30. 2022

빨강머리 앤의 미니멀라이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게 하는 -

나는 한 번 읽은 책은 거의 다시 읽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다시 보는 거의 유일한 책이 바로 빨강머리 앤이다. 어른이 되어서 애니메이션도 다시 봤다. 어릴 땐 앤의 순수하게 빛나는 밝은 미소와 싱그러운 그녀 특유의 명랑함 그리고 길버트와의 풋풋한 사랑이야기가 흥미로워서 빨간머리 앤을 좋아했는데 커서 보니 어릴 때와는 사뭇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아이를 낳고 미니멀리스트를 자청하며 미니멀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중에 보는 빨강머리 앤의 풍경은 온통 미니멀라이프로만 보였다.






마릴라의 부엌

빨강머리 앤의 이야기는 이웃집에 사는 레이첼 린드 부인의 호기심으로 시작된다. 밝고 따스한 햇살이 가득한 이른 6월의 어느날, 레이첼 린드 부인은 초록 지붕 집의 매슈가 마차를 몰고 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튜의 외출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초록 지붕 집으로 향한다. 그녀가 마주하는 초록 지붕의 집은 짙은 초록빛이 가득한 곳이다. 깔끔하고 정갈한 마당에는 아무렇게나 떨어진 나뭇가지나 돌멩이조차 없다. 집의 안주인인 마릴라는 집안만큼이나  밖도 깨끗하게 관리한다는 사실을   있는 대목이다. 초록지붕 집은 요즘의 미니멀라이프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마릴라의 부엌은 사람이 아예 쓰지도 않는 공간인 것처럼 매우 깔끔하다. 식사 후에는 바로 식탁 위를 깨끗하게 치우고 설거지를 하며 식탁을  깨끗하게 한다. 주방 선반 위에도  필요한 것만 간소하게 두며, 부엌의 지하 식료품 창고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모든 주방 용품을 소중히 다루고  정리하는 마릴라의 살림을 보면 마음이 정갈해진다. 항상 깨끗한 테이블과 정돈된 주방 찬장.  집의 마루도  깨끗하게 쓸고 닦는다. 단출한 살림은 모든 것이 넉넉하지 않았던 시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아무리 가난한 살림이라 해도  보듬지 않는다면 엉망이 된다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앤의 방

원래 마릴라는 고아원에서 남자아이를 데려와서 부엌 옆의 작은 방에 소파 하나를 두고 지내게 할 셈이었는데, 앤을 데리고 살게 되자 (여자 아이가 머물기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동쪽 다락방을 앤에게 내어준다. 티끌 하나 없는 아주 깨끗한 현관을 지나서 2층으로 올라가면 그보다 더 깨끗한 다락방이 있다. 2층의 동쪽 다락방은 매슈와 마릴라가 생활하는 공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릴라는 사용하지 않는 이 공간까지도 늘 깨끗하게 관리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불이 깔끔하게 펼쳐진 침대 옆에는 다리가 세 개인 작은 탁자가 하나 있다. 촛불 등을 올려두는 탁자이다. 앤이 초록지붕 집에서 보내는 첫날밤은, 마릴라가 원하는 남자아이가 아니라 다시 고아원으로 보내지게 될 거라는 절망감을 안게 된 밤이다. 그런 앤의 눈에는 지나치게 깔끔하고 인테리어 소품조차 하나 없는 휑한 이 다락방이 더욱 싸늘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앤이 초록 지붕에 살게 되면서 온기 없던 이 공간은 점점 따스한 온기가 가득한 곳이 된다. 그녀의 단짝 다이애나는 앤에게 연하늘빛 실크 드레스 차림의 숙녀가 그려진 그림을 선물로 준다. 그 그림 하나만으로도 앤의 방은 앤의 멋진 상상력이 더해져 더할 나위 없이 멋진 공간으로 변신한다. 마릴라는 앤에게 방을 관리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자고 일어나면 침대보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입었던 곳은 잘 개어서 의자 위에 올려놓으라고 알려준다. 앤에게는 잡다한 소지품이 없어서 정리하는 것도 매우 쉽다. 고아가 되어 여기저기 다니며 꼭 필요한 물건만 지니게 되었으리라. 앤의 방은 소지품이 거의 없어서 늘 깔끔하게 유지하기 쉬운 곳이다.


앤의 옷

앤은 고아원을 떠나면서 낡은 윈시(윈시 작물로 만든 드레스) 드레스를 입고 온다. 몸이 자라도 마땅히 새로 입을 옷이 없어서 계속 입다 보니 몸에 딱 맞게 되어 깡마른 앤의 몸을 더욱 볼품없어 보이게 만드는 낡은 드레스. 그래도 앤은 그 옷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연하늘색 드레스라고 상상하며 입어왔다. 그런 앤에게 마릴라는 직접 옷 세벌을 만들어준다. 우중충한 색깔의 깅엄천으로 지은 드레스 한 벌, 흑백 체크무늬 새틴 천으로 지은 드레스 한 벌 그리고 흉한 파란색의 딱딱한 날염 천으로 지은 드레스 한 벌. 세 벌의 드레스는 아무 장식이 없는 단조로운 드레스들이었다. 퍼프 소매가 달린 멋진 드레스를 입고 싶은 앤에게 이 세 벌의 옷은 예쁜 옷은 아니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앤에게 마릴라는 여름의 원피스는 이 세벌이 전부라고 딱 잘라 말하며 갈색 깅엄 옷과 파란색 나염 옷은 학교 갈 때 입고, 체크무늬 새틴 원피스는 교회 갈 때 입으라고 알려준다. 여유로운 살림이 아니어서 세 벌의 옷으로 여름을 나야 하는 것이겠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사실 서너 벌의 원피스만 있어도 충분히 여름을 날 수 있다. 원피스야말로 진정한 미니멀 의상이 아닌가! 위아래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 의상 고민의 시간도 덜어주고, 시원하기도 하고 몸매 보정도 제대로이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마음에 쏙 드는 원피스 서너 벌로 여름을 보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늬가 없지만 주머니가 있어서 실용적이고 편한 폼이 큰 원피스 한 벌, 입을 때마다 설레는 화사한 꽃무늬 원피스 한 벌, 격식 있는 자리에 입기 좋은 블랙 원피스 한 벌, 바지와 함께 입을 수도 있는 셔츠용 원피스 한 벌. 이 정도만 있어도 여름 의상은 끄떡없을 것 같다.


앤의 퍼프소매 드레스

마릴라가 지어준 드레스들도 앤은 오랫동안 소중하게 잘 입는데, 이런 앤에게도 멋진 드레스가 생긴다. 어느 날 크리스마스 학예회 준비를 하는 앤과 친구들을 보게 된 매튜 아저씨가 앤만 다른 친구들과 다른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앤에게 멋진 옷을 선물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매튜.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갈색 퍼프소매 원피스를 선물해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퍼프 소매가 있는 원피스를 갖게 된 앤! 앤이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원피스이다. 화려한 색은 아니어도 그녀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원피스였다. 누구에게나 멋진 드레스는 있겠지만, 그게 여러 벌이 되면 소중함도 덜해지는 것 같다. 앤의 퍼프소매 드레스도 딱 한 벌이기 때문에 더욱 특별하고 소중한 드레스였을 것이다. 가진 게 적을수록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앤의 상상력

앤에겐 장난감이 따로 없다. 이웃집 농장 근처의 작은 땅은 다이애나와 앤의 소꿉 놀이터이다. 하얀 자작나무들이 동그랗게 둘러싸인 공간. 온통 이끼로 뒤덮인 큰 돌덩이를 의자로 삼고, 널빤지를 선반으로 만들어 쓴다. 깨진 도자기 조각들을 그 위에 올려놓고 멋진 접시라고 상상하며 논다. 그녀의 멋진 상상력 덕분에 이 조각들은 엄청난 보물이 되는 것이다.  값비싸고 다양한 종류의 장난감보다 앤의 상상력에 기반한 쓸모없는 것들로 만들어진 장난감이 훨씬 더 멋져 보인다. 그녀의 상상력은 어쩌면 이러한 보잘것없는 것들로 인해 풍부해졌으리라. 눈앞에 없기 때문에 마음으로 멋지게 그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우리 아이도 다른 집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장난감이 많은 편은 아니다. 매일 원목 블록으로 노는데, 블록은 멋진 집이 되기도 하고 자동차, 비행기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군사들이 되어 전쟁을 하기도 한다. 하루는 아이가 너무 정리 정돈을 하지 않아서 모든 장난감을 싹 치워버린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아이는 페트병, 상자, 막대기 등으로 혼자서 아주 즐겁게 놀았다. 이 일로 인해 아이의 무한한 상상력은 사실 장난감이 없어져야 더욱 풍부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빨강 머리 앤의 풍부한 상상력의 원동력은 가진 게 거의 없어서였다.  






앤의 이웃, 린드 부인은 앤에게 기대하는 것은 실망감을 안겨주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것이라고 알려주지만, 앤은 실망하더라도 기대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기대하는 그 자체로 인생에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실망이 두려워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게 되었다. 미니멀라이프는 나에게 기대하는 삶을 살게 해 준다. 주변을 정리하고 보살피며 나를 생각해보게 한다. 그저 흘러가는 삶이 아닌 내가 주인공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대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게 해주는 미니멀라이프.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게 해주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면, 미니멀라이프를 추구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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