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옴표로 남은 사람들> 대체 우리 나이가 뭐길래?
“우리 오빠 친구 소개받아볼래?”
술을 먹다 대뜸 휴대전화를 치켜들며 친구가 물었다. 10년간의 연애를 마친 지 6개월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왜 헤어졌는지, 헤어지고 연락은 왔는지, 조심스러운 취조를 이어가던 그녀는 나보다 더 들뜬 얼굴이 되어서 조잘거렸다.
“막... 되게.. 잘생기고 막 그런 건 아닌데, 사람이 좋대. 오빠가 또 사람 되게 가리거든. 근데 그런 오빠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니까 편하게 만나봐”
내 얼마 되지 않는 데이터를 굴려보자면, ‘막 되게 잘생긴 건 아닌데 사람 좋은 남자’는 여자가 반하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나는 막.. 되게... 당기진 않았지만 나 따위가 뭐라고 당기고 안 당기고를 고민하고 앉았나 자학에 빠져 얼떨결에 수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밤,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씨 소개받고 연락드려요”
세윤(가명)은 들은 그대로의 남자였다. (내 친구의 짤 없는 객관성에 찬사를 보낸다) 한눈에 끌리지는 않지만 수더분했고, 웃음소리는 농촌 청년의 그을린 피부처럼 건강했다. 긴장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내가 주위로 시선을 돌릴 때마다 몰래 나를 흘긋 하는 눈빛이 어수룩해서 좋았다. 반면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하는 게 있다면, 나를 신기해했다는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방송작가인 내겐 직업병이 있다. 어딜 가나 대화가 끊기면 불안해하는 ‘진행병’, 나는 유퀴즈 진행자라도 된 것처럼 그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화려한 물개 박수 리액션과 나주평야처럼 넓어지는 코 평수는 덤.
(나) “고깃집에서 만나는 소개팅 처음이라고요? 그럼 전에는 어디에서 만나셨어요?”
(또 나) “기분 좋은 일 있으셨다고요? 뭐요? 어머 주택청약 당첨?!! 이거 자랑 맞죠?”
(계속 나) “외근할 일이 많으면 운전하느라 피곤하겠다. 어느 지역에 제일 많이 가요?”
(너도 먼저 말 좀 해라, 그럼에도 나) “내일은 몇 시 출근이에요? 술 드셔도 돼요?”
이제와 고백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랬냐 묻는다면 친구 남자 친구의 친구라서 신경을 쓴 건지도, 내 리액션에 탄력 받아 조잘거리는 그가 즐거워 보여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또 직장인에게 주말이 얼마나 귀중한지 알아서이기도 했다. 그렇게 첫 만남이 있은 직후, 그는 나에게 큰 호감을 가진 듯했다. (보통 소개팅을 하면 남자들은 분위기를 리드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는데, 내가 이끌어서 편했나 보다, 내 직업병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로구나 ) 친구와 친구의 남자 친구는 나보다 더 흥분해서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둔갑했다.
(친구 남친) “우리 넷이 여행 가면 너무 좋겠다”
(친구) “그 집 돈도 많대. 아버님이 주유소도 있고, 금은방도 운영하시고 그렇다던데? 일단 비밀이야 모른 척 해 알았지? 야 우리 나이에 이 정도면 딱이지 적당히 만나다 결혼하면 무난하잖아”
확실한 끌림은 없었지만, 몇 번 더 만나볼 요량이었다. 20대에는 어떤 사람이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 이면 그만이다 생각했다면, 30대엔 다르다. 좋은 사람을 좋아하고 싶다. 내게 좋은 사람이란 가치관과 생활방식이 잘 들어맞는 사람, 갈등이 닥쳐도 대화의 여지는 남겨두는 사람을 말한다. 좀 더 욕심부리자면 감정 기복이 심한 나를 가끔은 견뎌줄 수 있는 사람. 이건 언제까지나 나의 희망사항이지만.
그런데 좋은 사람이라고, 좋아지는 것도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남녀 사이의 ‘좋은 사람’은 결국 ‘이성적인 매력’이란 값으로 떨어지기 어려웠다. 나는 오밤중에 찾는 야식 같은 이성을 원했고, 그는 이른 아침 먹는 콩나물국 같은 남자였다. 아스파라긴산이 듬뿍 들어 취기를 없애는데 도움은 될지언정, 나를 ‘취하게’ 만들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그와 있을 때 빈번이 사라지는 무드에 실망했고, 지나친 솔직함에 거부반응이 일었다.
(세윤) “저는 책을 잘 안 읽어서요, 왜 읽는지도 모르겠어요. 머리만 복잡해지는 것 같고...”
(세윤) “저는 차량용 방향제 안 써요, 머리가 아파서”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 내 앞에서 책을 왜 읽냐 묻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차량용 방향제를 안 쓴다는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의 차에 탈 때마다 흔히 말하는 ‘아재 냄새’ 때문에 힘들었기 때문이다. (덜 마른 러닝 냄새, 환기 안 된 보일러실 냄새 같은..) 혹시나 민망할까 “요즘 석고 방향제 예쁜 거 많더라고요~” 돌려 말했지만 머리 아파서 싫다는 말만 돌아왔다. 나는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했고, 부디 그의 내비게이션이 빠른 길찾기 달인이길 간절히 바라면서 숨을 참았다.
그렇게 세 번째 만남에도 별다른 마음의 진척이 없자, 나는 친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안될 것 같다고. 그런데 돌아온 친구의 대답은 이랬다.
친구는 통화를 마칠 때까지 ‘우리 나이에’ 란 말을 틱처럼 해댔다. 듣다 지친 내가 대체 우리 나이가 뭔데~ 우리 나이가 왜~라고 묻자, “야 나도 **오빠 원래는 별로 안 좋아했어” 라며 갑자기 자신의 연애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지금의 남친 역시 본인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만나다 보니 좋아졌다, 그러니 너도 좀 참고 만나다 보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전화를 끊고 나니 영 서글펐다. 20대 같은 사랑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끌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잠시 곁을 내줄 수도 있는 게 20대라면, 지금은 누구 하나 내 바운더리에 들이는 게 쉽지 않으니까. 나는 그게 에너지 때문인 것 같다. 청춘의 열기는 다 된 밥솥의 김처럼 빠지고, 연애의 ‘방식’도 이에 맞게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왜 ‘방식’의 문제가, 마음까지 잠식해버리는 걸까. 상대방을 ‘참고’ 만나봐야 할 만큼 시들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친구의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녀가 보기에 나는 한 사람과 너무 오랜 연애를 하다가, 결혼 적령기를 놓쳐버린 비련의 30대 여성일 수도 있다. 사랑, 사랑, 사랑만 외치다가, 사랑이 떠나자 공터가 되어버린 여자. 그러니 적당한 사람 만나서 잘 살면 그만이지, 여겼을 것이다.
우리 나이란 뭘까, 사랑의 ‘완성’= ‘결혼’이 되는 세상에서 나의 지난 연애는 보는 이에 따라 ‘실패’로 정리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실패에서 깨닫는 게 ‘우리 나이에’ 같은 체념뿐이라면 나는 지난 사랑을 실패로 여기지 않겠다. 포기가 미덕이 되는 순간이 있단 걸 깨달은 지금에도 각자의 ‘마지노선’ 이 나다움을 지키는 이정표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포기의 이유에 ‘나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게 내 마지노선이다.
아직은 믿고 싶다. 나를 찾아오지 않은, 내가 기다리는 마음이 남아있다고. 그게 설령 현실을 1도 모르는 노처녀의 환상처럼 비칠지라도, ‘사랑’을 쫓는 내 마음이 나를, 내가 쓰는 모든 글을 환히 비춰줄 것이다.
세윤(가명)씨에겐 거절의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내가 그랬듯, 앞으로 그가 겪게 될 연애의 역사에 ‘우리 나이에’라는 포기가 깃들지 않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