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러나 오래도록 떠나지 않는 물건에 대해
그 날의 공기는 탁했다. 사람들은 좁은 버스정류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보내느라 바빴고, 나 역시 그 중에 하나였다. 멀리뛰기 선수처럼 제일 먼저 버스에 올라탄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손을 흔들었다. 이별이 홀가분한 것처럼.
아빠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할머니는 아빠를 붙잡고 연신 당부했다. 술 그만 먹어라, 밥 잘 챙겨 먹어라, 전화 자주해라, 애 걱정은 말아라. 그러는 동안에도 아빠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는 이러다 할머니가 버스를 타지 않을까봐 “할머니 빨리 타~~ 빨리 와~~~” 정류장의 온갖 소음과 고음대결을 벌였다. 혼자 남겨질까봐, 영영 나를 버리는 건 아닐까, 불안함이 많은 열 한 살이었다.
아빠의 방황은 길었다. 엄마와 헤어진 이후, 좀처럼 집에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저런 게 아들이냐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할아버지와 갈등이 심했던 게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를 이해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아빠는 한심했다. 도무지 ‘아빠’ 란 호칭을 얻을 수 있는 양반이 못됐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니네 아빠가 나한테 돈을 빌려가서 안 갚는다’는 협박 짙은 전화를 받아야했고, 우리집 대문을 부서질 듯 두드리며 돈을 요구하는 아저씨들을 참아내야 했다.
그래서였다, 그 날 버스에 올라탄 내가 홀가분했던 것은.
어디서 뭐하고 지내는지 도통 모르겠는 아빠를 만나는 일이 버거웠다. 어쩌다 한 번 얼굴 비추고 친한 척 하는 것도 잠시뿐, 할머니와 언쟁을 벌이는 아빠가 미웠다. 중국집에서, 백반집에서, 분식집에서, 도로 한 복판에서. 아랑곳 않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내 불행을 들켰다는 수치스러움에 발끝만 보고 서 있었다.
그러니 좋았다. 아빠와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는 게 마음이 편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지만, 언제 봐도 상관없고, 안 봐도 나쁠 것 같지 않은 느낌. 한결 가벼워진 내가 막대사탕을 빨며 조잘조잘 떠들 때, 할머니는 이상하게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떠들었다. 할머니가 오래된 책처럼 노랗게 질려가는데도, 오래된 꽃처럼 말라가는데도, 할머니의 가방 밑바닥에서 누룽지 사탕을 찾으면서 말을 걸었다.
“할머니, 나 떡볶이 해주라”
“할머니, 내일도 일 나가야 돼?”
“할머니, 나 만화 봐야 되는데 할아버지가 자꾸 씨름 봐, 짜증나!”
버려질까 두려운 사람은,
자꾸만 말을 걸게 된다는 걸
시간이 이만큼 지난 후에야 알게 됐지만.
아무튼 그 날이 있고 얼마 후, 늦은 밤. 누군가 우리 집 대문을 쿵쿵 두드렸다. 나는 심장이 벌렁거려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떨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아빠였다. 만취한 아빠는 조악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내 이름을 불러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방에서 나와 아빠를 대면해야 했다. 한 눈에도 거칠어 뵈는 오른손에는 커다란 갈색 곰인형이 인질처럼 잡혀있었다.
“갖고 싶다며~~~ 딸~”
언젠가 거리를 지날 때, 노점상에 파는 커다란 곰인형이 갖고 싶어서 생떼를 부린 적이 있다. 잘 때 안고 잘 게 필요하다고, 저 정도 크기는 되어야 내 큰 키를 감당할 수 있지 않겠냐면서. 아빠는 지리멸렬한 방황 속에서도 용케 그 말을 기억해낸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인형을 안을 수 없었다. 내 맘에 쏙 드는 데도 그럴 수가 없었다. 곰인형의 발이 새까맣게 더렵혀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술김에 질질 끌고 왔구만”
할머니가 아빠 등짝을 세게 내리치며 말했다.
“인형이.. 인형...이게 곰...”
아빠는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중얼거렸다.
나는 방에 들어가 조용히 울었다. 좀 노멀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 안되나~~ 뭐 그런 마음이었겠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한들 한손으로 힘껏 안고 올 수는 없었던 걸까
다음날, 아빠는 없었다.
대신, 지난 밤 내가 외면해버린 갈색 곰인형이 거실 구석에 애처롭게 앉아있었다. 복잡한 가정환경 덕분?!인지, 일찌감치 애 어른이 된 나는 내 팔자 더럽다고, 얘 팔자까지 더러워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친구를 화장실로 끌고 들어가 뭉툭한 두 발을 벅벅 씻겼다. 발이 젖은 그 친구는 나를 더 슬프게 했지만, 있는 힘껏 물기를 짜고 나니 이상하게 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는 어디 있는 걸까. 술은 깼을까.
당시 아빠의 나이는 기껏해야 서른 넷. 그 나이도 지나버린 지금의 나는 이제야 조금 아는 것이 생겼다.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건 괴로움으로 남은 과거가 있기 때문이고, 자꾸만 목소리를 높이는 건 외롭다는 뜻이고, 딸에게 줄 곰인형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걷는 건 미안하다 무릎 꿇고 싶은 부모의 마음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30대의 나는, 미워했지만 끝내 미워하지 않는 법을 알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빠와 나의 관계는 내가 성인이 된 이후 훨씬 좋아졌다. 아빠와 나 모두 할 수 있는 방황은 다 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글을 썼다는 걸 알면 아빠가 서운하겠다.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믿는다.
진심이나 진실은 다 그런 것이 아니겠냐며 소주 한 잔 넉넉히 따라드리면 될 일이다.
그 차갑고 쓴 물에는 오래된 미움도 씻겨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