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버리지 못한 눈물에 대해
글이 밥이 되는 건, 시장 바닥에 소쿠리 째 놓인 어느 할머니의 이름 모를 푸성귀가 완판 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할머니 옆에 할머니가 또 그 할머니 옆에 다른 할머니가 같은 종류의 것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팔리는 글을 쓰려 안간힘 써도, 내가 갓 따낸 문장보다 싱싱한 글이 지천에 널려있다. 그래서였을까, 개편이라는 칼바람을 견디지 못한 건 - 내가 밥이 되지 못하는 글을 써서였을까, 오래 묵은쌀로 글을 지었기 때문이었을까.
선배는 종종 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몇 년 전 아침 프로그램에서 인연이 닿은 그녀는 다른 말 대신 술잔을 끊임없이 채워주었다. 십여 년의 방송작가 생활 이후 대기업 홍보팀으로 이직한 선배는 '애 열심히 키우자' 란 결심으로 출근한다고 했다. ‘불안정’ ‘성취감’ ‘핵잼’으로 대변되는 것이 방송작가의 삶이라면, ‘역대급 노잼’으로 정리되는 것이 지금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급 노잼으로 마음이 기운 것은 딸을 안정적으로 케어 하고 싶어서 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래도 그게 어디야, 배부른 푸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면 내가 참을 수 없이 지질해서겠다.)
선배네 집에 도착하니, 여섯 살 난 꼬마가 분홍빛 민소매 드레스를 입고 인사를 해왔다. 만날 사람도, 할 일도, 하고 싶은 것도 없이 방치된 나의 손을 잡아끈 건, 작고 보드라운 꼬마의 새끼손가락이었다. 나는 비어버린 시간 속을 부유하다 이윽고 땅에 발을 딛는 기분이었다. 아이의 살 냄새, 저녁을 준비하는 부엌 냄새, 어지러운 듯 질서 있게 널려있는 물건들까지. 낯설고 따뜻해서 눈이 따끔거렸다. 보통날과 멀어진 나의 요즘이 발끝에서부터 통증을 일으켰다.
좌절한 사람을 앞에 두고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그저 맛있는 음식과 술을 내어주는 일일 것이다. 가끔 눈을 맞추고, 등을 토닥이고, 실한 고깃덩어리를 국자로 뜨며 이것 좀 먹어보라고 호들갑 떠는 것. 선배가 그랬다. 내 깊은 우울을 어떻게든 간주 점프해보겠다는 의지, 흡사 백일 사진을 찍는 아이가 울지 않게, 그 앞에서 딸랑이를 열심히 흔드는 것처럼. 그럼 나는 그 다정함에 홀려 그칠 수 있었다.
그 밤, 선배의 딸, 그러니까 조카는 더 놀고 싶다고 응석을 부리다 술상 밑에 누워 잠이 들었고, 우리는 감기는 눈으로 술이 시킨 진심을 늘어놓다가 쓰러졌다. 다음날 아침, 온통 핑크색으로 도배된 조카의 이 층 침대에서 내려올 때가 되어서야 나는 “어머 미친년”이라는 자조 섞인 욕을 백번이고 반복하면서 민망함을 누그러뜨렸다.
그때 안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꽹과리를 쉴 새 없이 치는 것 마냥 커다란 울음,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울음. 그 사이 쉼표처럼 숨어 있는 숨소리가 위태로워서, 다 큰 내가 집에 가는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잠투정이라고 했다. 선배는 엄마 아아아~~~ 하고 우는 딸을 토닥이며 침대 끝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러는 동안 한 번도 깨지 않는 형부는 혹시 사람 아닌 척하는데 도가 튼 팬터마임 최강자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울고 싶은 날이 많았다. 울면 그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침을 삼켜야 했던 밤이 있었다. 단지 ‘하던 일이 사라져서’ 보다는, 과거를 기억상실로 남겨두어야 살 수 있다는 게 괴로워서였다. 그렇다고 마음을 주어 썼던 모든 것이 파지가 되어 갈리는 꼴을 지켜볼 수도 없었다.
조카의 울음소릴 들으면서 생각했다. 아침부터 소리 내어 울 수 있다면, 이런 나를 봐달라고 할 수만 있다면
긴긴 새벽 정물처럼 앉아있는 일 따위는 없을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