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그와 잠들지 못하는 그녀 사이
다시 불면의 밤이 시작됐다. 일찍 일어나 몸을 고단하게 하고 술을 마셔도, 저녁이 깊어지면 의식이 몽롱하게 또렷해졌다. ‘몽롱한 또렷함’ 뭔 말 같지 않은 소리냐 물어도 논리적으로 답변드릴 수 없다. 지금으로썬 그 표현이 최선인 것만 같다. 새벽 세시, 그에게 연락이 왔다. 얼마 전 제주도 숲길에서 만난 두 살 터울의 남자. 그 인연으로 나와 흑돼지를 먹고, (혼자만의 여행에서 제일 아쉬운 건, 나님이 고깃집 혼밥 레벨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와인을 홀짝여주던 사람. 고요한 월정리 해변과 불어오던 바람의 세기 같은 것들이 우리 대화를 더 달큰하게 만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섬세한 사람이라서, 내가 이 시간에 깨어있다는 걸 확신하면서도 “** 씨 자요?” 하고 습관성 예의 차림을 잊지 않았다. (카톡이 오고 5분도 되지 않아 전화가 울렸기 때문에, 습관성 예의 차림이었다는 것을 99.9퍼센트 확신하는 부분이다.) 일단 나는 놀랐다. 제주도 여행 뒤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진 않았지만, 그가 최근 하게 된 일 때문에 일찍 잠든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근데 새벽 세시? 무슨 일일까? 혹시나 술주정일까 싶어 살짝 불안했지만, 나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잠들지 못하는 내가 싫어서 괴로웠고, 베개를 베고 누워 왼쪽 얼굴이 찌그러진 채 시들어가는 중이었으므로 받기로 마음먹었다
술자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원치 않는 조합으로 술을 먹는 동안 살짝 마음이 불편했고, 말이 통하는 (마음이 통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전화했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그렇게 시작된 통화에서 나는 혼란함을 느꼈다. 우리가 제주에서 나눈 시간들이 함께 달의 앞면을 보고 기뻐하는 모양새였다면 이젠 그가 내가 모르는 어떤 뒷면에 올곧게 서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가 했던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정리, 요약해보자면, 1. 나는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는데 나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괴롭고 싫어요.. 2. ** 씨는 좌우명이 뭐예요? 나는 두 개예요. 갈등은 OK, But 후회는 하지 말자, 빚과 원수는 반드시 갚자. 3. 나는 누가 나를 필요로 하는 데에서 행복을 느껴요. 안 그러면 사는데 의미가 없어요. 4. 우리가 사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죠. 5. 회사에 너무 싫어하는 직원이 있는데, 그래도 내가 이끌어줘야 할 것 같아요. (술이 취한 상태로 한 이야기였으며, 나 역시 개연성 없는 꿈에 취한 듯한 정신으로 전화를 받았으므로 다소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양해 바란다..)
나는 진심으로 대화하려고 노력했다. 그 역시, 제주에서 나에게 그래주었으니까. 그래서 일단 나는 1. 변하는 게 뭐 어때서, 변하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살기 위한, 그러니까 ‘적응’ 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다. 2. 나는 좌우명이랄 건 없고 어떤 일을 겪을 때마다 ‘좀 더 나은 실패’를 하길 바란다. 덧붙여 말하자면 나는 인생 자체가 후회고, 빚은 안 갚아도 원수는 갚는 편이다. 3. 내 행복을 왜 타인으로부터 찾는지, 잘 모르겠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해서 행복할 순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4. 그래서 대체 행복이 뭐죠? 5. 싫어하는 사람한테 그렇게 시간 쓸 거면, 차라리 나한테 써요...
남들 다 자고 있는 시간에 이게 뭐 하는 건지, 침묵이 흐를 때마다 현타가 왔지만 (내 입장에서 보자면) 안타까운 부분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때 쉽게 ‘단언’ 했다. 그리고 타인의 의견은 간단히 ‘분류’ 해버렸다. 내가 ‘더 나은 실패’를 말하자 “그럼 성공이 아닌 거잖아요”라고 답했고, 내가 특별히 불행할 일이 없는 것도 행복이라고 하니, “그건 너무 슬프다”고 말했다. 행복의 반대는 슬픔, 성공의 반대는 실패? 내가 생각하는 인생은 그런 게 아닌데... 그러나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모든 말끝이 너무나 단호했기 때문이다. “아니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아니요 확실해요” 그렇다고 그를 비난하자는 건 아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방식이 존재하기에 존중하며 돌아보고 싶다. 조심스레 알아보고 싶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생각할까? 이해하고 깨닫고 싶다.
자꾸만 정의를 내리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흔들리는 사람, 불안한 사람, 그래서 최대한 맘 편한 외면을 택하는 사람, 그 이상 깊게 묻지 않는 사람,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서 평온을 찾고 싶은 사람...
한 때 나도 그랬다. 얕은 고민을 늘어놓고 거기서 뭐 대단한 깨달음이나 확신을 얻은 것 마냥 떠벌리기도 했던 것 같다. 마치 매일 똑같은 음식만 먹으면서 ‘이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바깥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등으로만 바라보면서.
고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민을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입을 떼려고 할 때마다 내 안의 초자아가 ‘너나 잘해라’ 고 타박했기에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단언’으로 정리되기보다는 ‘흐름’으로 정리하는 것. 생각은 언제든지 어느 곳으로든 흘러가기에 쉽게 장담하지 않는다. 나의 오늘을 새롭게 바라보는 나의 내일이 찾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출발은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다. 나라는 조각을 모아가는 과정을 삶이라고 여기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런 사람에서 ‘이런’을 모아가는 거다. 죽을 때까지 모아야 하므로 변하는 것이 괴로움이 되는 일은 비교적 적을 것이다.
오늘 오후, 술 먹고 헛소리해서 미안하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괜찮다 (어차피 나도 브런치에 헛소리 썼어요)” 고 말했다. 그는 좌우명대로 지난 새벽의 통화를 ‘후회’ 하지 않는 걸까. 아니, 않을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