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가두는 이유, 꺼내는 이유

『When You Trap a Tiger』를 읽고 난 후

by 도그앤미

『When You Trap a Tiger』를 읽고 난 후

할머니가 보고 싶어

오랜만에 동화책 한 권을 다시 집어 들었다.


『When You Trap a Tiger』(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1년 전에 이미 읽었던 책이다.

그 때의 나는 이 책을 이렇게만 이해했다.


할머니와 작별인사하는 장면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는 것,

호랑이는 Lily의 내면 변화를 이끌어내는 상징이었고,

Lily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라는 것.


그 정도로 이해하고 책을 덮었다.


다시 읽으니, 이 책은 이별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이 책은

단순히 할머니와의 이별을 다룬 동화가 아니었다.


이 책은 이민 가족이 겪는 슬픔,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가둘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할머니가 훔친 것, 그리고 병 속에 가둔 것


이야기 속에서 할머니는 호랑이에게서 무언가를 훔쳤다고 말한다.

그것은 돈도, 생명도 아닌

이야기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들을 병 속에 숨겨 두었다고 한다.

무섭고, 고통스럽고, 꺼내면 다시 아파질 이야기들이라며

차라리 꺼내지 않는 게 낫다고 하면서.


Lily가 듣게 되는 잔인한 이야기


Lily는 호랑이에게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는 대신

할머니의 건강을 돌려달라고 제안한다.


그 중 하나의 이야기는 이렇다.


반은 호랑이, 반은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이

자신의 딸만큼은 그렇게 태어나지 않게 해달라며 신에게 부탁을 한다.

신은 조건을 내민다.

하늘에서 일을 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그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은 결국 딸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였을까


이 이야기는 할머니가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할머니의 엄마는 할머니를 남겨두고 떠났다.

다른 나라로, 다른 삶으로.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 이야기를 자신만의 도피처로 삼았다.


이야기 속에서처럼 '딸을 지키기 위해 엄마가 떠난 것'이라 믿음으로써,

엄마도 이유가 있어 떠난 것이라 스스로를 위안했을지도 모른다.


반 호랑이, 반 인간 - 정체성의 은유


더불어 이 이야기 속

반 호랑이, 반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는 또 다른 슬픔까지 함께 담고 있다.

그 존재는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 모습은 이민자로 살아가며

정체성의 경계에 서 있었던 할머니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것


할머니는 한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며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 삶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언어는 온전히 내 것이 아니게 되고, 문화는 설명해야 할 것이 된다.

이민 1세대로서 적응하면서 자신의 문화를 지키려 할 때

이웃들의 시선은 낯설고 차가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 자신만을 위해 자유롭게 살아보지 못했다는 슬픔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들은 끝내 병속에 가둔 채로 남는다.


Lily가 한 걸음 더 나아간 지점


Lily는 나중에 깨닫는다.

호랑이의 이야기가 곧 할머니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하지만 Lily는 할머니와 다르다.


Lily는 버려지지 않았고, 이민의 1세대가 아니며, 생존이 삶의 최우선 과제가 아닌 세대다.


그래서 Lily는 슬픔을 직면해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Lily는 이야기들을 가두는 대신, 이야기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그 고통을 안은 채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그 과정 속에서 조용한 아시안 걸은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타이거 걸'로 성장한다.


하지만 그 성장은 호랑이가 구원자로 등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호랑이는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마냥 친절한 존재가 아니다.
늘 대가를 요구한다.

떡을 요구하고, 이야기를 요구하고, 고통을 직면하게 만든다.


호랑이는 치유자가 아니라, 세상을 직면하게 만드는 존재에 가깝다.

고통을 없애주지는 않지만, 더 이상 피하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는 사람을 치유하기도 하고 마음을 전달하기도 하며,

때로 마음의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조금 다르게 말한다.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같은 무게가 아니다.


할머니는 살아남기 위해 이야기를 가두어야 했고

Lily는 살아갈 수 있기에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When You Trap a Tiger 책은 이야기의 힘보다

우리가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가를 묻는다.


오늘의 우리는 슬픔과 아픔을 직면하고,

그것을 말하고, 글로 쓰고, 나 자신을 표현하는 세대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더 강해서라기 보다,

생존이 삶의 최우선 과제가 아닌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버티는 것보다 나를 돌보는 데 조금은 여유가 생긴 세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이민자는 아니었지만,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던 한 세대를 살아낸

할머니의 모습이 눈 앞에 스쳐간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는 이야기를 가둬야 살아남았고

Lily는 이야기를 품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차이만큼, 세상은 조금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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