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세계의 입자와 아이

확률을 조금 바꾸는 일에 대하여

by 도그앤미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양자역학을 들여다보면,

입자들이 문득 아이들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내가 아는 양자역학은

바닷가 모래밭에서 모래 알갱이 하나를 집어 든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 작은 모래 한 알이 생각보다 많은 질문을 남긴다.


입자와 아이들


우리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 원자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는 학문이 양자역학이다.

우리의 몸은 거시세계에 존재하지만

그 몸을 구성하는 수조 개의 원자와 전자는 양자의 법칙이 지배하는 미시세계에 속해 있다.


미시세계에서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

이것은 측정 기술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전자라는 존재 자체가 원래부터 위치와 운동량이 확정되지 않은 뿌연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설명을 듣다 보면 초등학생 아이들이 떠오른다.

아이들 역시 아직 확정된 상태라기보다는 어딘가 뿌연 상태에 가깝다.


물론 아이들마다 고유한 결은 있다.

순하고, 반항적이고, 야무지고, 장난기가 많은 아이들.

하지만 하루하루를 함께 지내다 보면

그 아이 안에서 서로 다른 얼굴이 번갈아 나타나는 순간들을 수없이 마주하게 된다.


지나친 승부욕으로 체육시간마다 친구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던 아이가

어느 날 '수학을 열심히 가르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편지를 건네기도 한다.


항상 선생님 말을 잘 듣고 친구들을 챙기던 아이가

어느 날은 자기 쓰레기를 슬쩍 친구 자리로 밀어놓기도 한다.


친구의 물건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던 아이가

어느 날 청소시간에 누구보다 열심히 움직이며 조금씩 거짓말을 줄이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왜 이렇게 모순적으로 보일까.


양자역학을 공부하며 그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직 ‘착하다’거나 ‘나쁘다’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양자세계의 입자처럼, 아이들 역시 한 순간의 행동으로 규정될 수 없다.



예측 불가능한 아이들과 확률


미시세계 입자 하나의 상태는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다.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어른이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는 입력하면 동일한 출력을 내놓는 기계가 아니라,

상황과 감정,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반응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종종 '앞으로는 이런 일이 절대 없게 해주세요' 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이들의 결함이 아니라 본성이기 때문에

선뜻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기 어렵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부터다.


입자의 하나의 상태는 불확실하지만,

그 확률을 기술하는 슈뢰딩거의 선형 방정식은 놀라울 만큼 안정적인 수학적 질서를 따른다.

개별 입자의 미래는 알 수 없어도, 수많은 입자가 모이면

그 집단은 일정한 확률의 분포를 형성한다.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나의 행동만으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기 어렵지만,

행동과 마음이 반복되면 우리는 점점 특정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따뜻한 말과 행동이 쌓이면 그 아이가 그런 사람으로 자라날 확률은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높아질 것이다.


가정과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확률이 옳은 방향으로 쌓이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고민하는 교사


현실에서는 그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이들은 아직 입자처럼 뿌연 존재들이기에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친구들을 놀리기도 하고, 선생님한테 대들기도 하며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 흐트러진 행동들을 바로잡는 일은 아이의 성장을 위해 필요하지만

요즘 학교 현장에서 그 과정은 살얼음판을 걷는 일과 같다.

훈육과 학대의 경계가 종종 분명하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사과를 권유하는 일이 '강요'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폭력을 멈추게 하는 단호한 말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다' 라는 지적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예전처럼 '이건 잘못이야’라고 단호하게 말하기보다,

한 번 더 고민하고, 한 번 더 돌아보게 된다.


그렇다면 포기해야 할까.


아이들은 아직 뿌연 존재들이기에 포기하고 싶지 않다.

포기하는 순간 아이를 하나의 모습으로 단정 짓게 되고,

그로 인해 다른 아이들이 받는 피해 역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은 많지 않다.

아이의 성장은 교사 혼자만의 노력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어쩌면 아이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것 자체가 나의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선택한 방식은 이것이다.

나 자신을 소진시켜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지속 가능한 교육을 해나가는 것.

아이들이 옳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그 확률을 아주 조금이라도 움직여 보는 것.


그것이 이 시대의 교사로서 지금의 내가 회피하지 않고 책임지면서

나를 지켜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작가의 이전글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불확실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