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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Aug 24. 2020

엄마의 청소부시절

그 때가 가장 좋았을 때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일간 이슬아'를 쓰는 이슬아 작가의 수필집에서 가장 근사한 대목은 엄마 복희씨와 아빠 웅의 이야기를 할 때다. 나 외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 동의할 것이라 믿는다.

이슬아 작가의 부모님의 이력은 남들에게 말할만큼 대단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슬아 작가에 의해 글로 쓰여졌을 때는 반짝반짝 빛이 난다. 나는 복희씨와 웅의 삶의 편린을 읽고서 이슬아 작가가 세상에 던지는 가볍고도 동시에 깊은 응시는 그 곳에서 태어났다 믿어졌다. 아빠 웅의 잠수부 시절 이야기를 읽을 때 특히 많은 눈물을 흘렸다.

노동을 아름답게 묘사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내 부모의 한 많은 서사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보통의 우리는 남들에게 부모님의 지난한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의 가슴이 먹먹하여 무너져내리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즘 나의 청소부 시절 이야기를 너에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왔었다.

너의 아빠를 따라 호주에 왔을 때 너의 아빠는 학생이었고 나는 한국에서 학생을 갓 졸업한 처지였다.

아빠의 한 학기 수업료는 AUD$15,000. 너의 아빠와 내가 한국에서 결혼하고 넘어올 때 손에 쥐고 있던 돈은 딱 한 학기 수업료였다.

우리들의 부모님은 네 분 모두 다 가난해서 우리에게 돈을 보태줄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걱정을 하지 않았었다. 네 아빠는 속으로 꽤나 살벌하게 느껴졌겠지만 나는 그렇게 크게 두렵지 않았었어. 여차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살지 뭐. 이런 생각을 초반 이년동안은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살았거든. 이토록 무책임을 장착한 아내를 두었다는 사실을 네 아빠는 당시에 몰랐을 것이다.


어떤 사회든지 말이 짧고 배움이 짧고 기술이 없는 사람에게 진입 장벽이 가장 낮은 일은 청소부다. 우리는 다른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청소부가 되었어. 심지어 나는 2019년 2월23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노란색 애벌레가 빗자루를 들고 있는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청소를 하러 갔었어. 참, 네 아빠가 일본 카레를 한 그릇 사먹이긴 했다.

나는 그 날 남자 소변기를 닦으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어. 어제까지만해도 고등학생들에게 언어영역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일주일 전에만 해도 임용시험 기출문제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말이야 남자 소변기를 닦으려고 무릎을 꿇고 있으려니.


그날 나의 '퍼포먼스'는 '청소를 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시간 떼우기에 불과했고 당연히 집에 가서 네 아빠와 심하게 말다툼을 했어. 청소부를 하겠다고 작정하고 왔는데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 내 모습에 네 아빠는 화가 났고 청소부를 하겠다고 작정은 했지만 진짜 그렇게 밖에 나를 대해주지 못한 너의 아빠 모습에 나는 서운했어.

그 후로 우리는 종종 싸웠다. 그 때 나는 네 아빠가 너무 싫었어. 너무 싫어서 내 인생을 무르고 싶었다. 네가 가끔 어디 가서 "우리 엄마 아빠는 한 번도 싸우지 않았어요" 라고 내뱉는 철없는 소리는 정말 뭘 몰라서 하는 말이다.


사람이 살다 이사 나간 집을 새 집처럼 만드는 본드청소, 새로 지은 건물에 먼지 하나 없이 윤을 내는 공사장 청소, 살림집에 가서 주인이 보는 앞에서 하는 홈클리닝 이런 청소는 대부분 낮에 하는 일들이고, 그 당시 매일 새벽 두시에 시작했던 인쇄소 공장 청소, 도시 외곽에 흩어진 통신사 기지국 청소, 시티의 빌딩사무실 청소, 은행, 관공서, 아파트 복도, 빌라 주차장 이런 청소는 보통 밤에 하는 일이었다.

사람이 살다 나간 자리가 제일 더럽고, 사람은 은밀한 곳에서 하는 더러운 짓에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그건 나도 그렇고 네 아빠도 그러하고 내가 청소를 한 공간에 머물렀던 모든 사람이 그러했다.


이 모든 일을 나는 결코 기쁘지 않게 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배겼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살이 텄고, 허리가 아프고, 위염이 그치질 않았어. 그리고 ,일을 해서 돈을 벌었으니 우리 두 사람이 사는 집의 세를 냈고 생활비도 썼고 가끔 외식도 했고 마지막에 네 아빠 학비를 내면 다시 통장은 제로. 그걸 다섯 번했지. 네 아빠가 다섯 학기를 다녔거든.

내가 함께 했기 때문에 네 아빠는 인부를 고용하지 않고서도 청소 사이트를 혼자 가져올 수 있었고 학비를 벌만큼 돈도 제법 벌 수 있었던 거야. 청소를 해서 일년에 그만큼 돈을 벌기는 쉽지 않아.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호주에서나 한국에서나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가끔 다시 생각해보아도 대체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했었는지 믿어지지가 않아.


우리는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는 이 시간을 자랑스러워 하게 되었지만 고백하건데 나는 분명히 힘들어했다. 어딘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여겼고 깊은 열등감과 피해의식, 서러운 망상에 사로잡혀 자유롭지 못했어.

그러나 만일 내가 그 때 포기해서 한국에 돌아갔거나, 혹은 그 이후로 내 삶이 계속된 내리막 길을 걸었다면 아니 지금까지 청소를 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면 나는 아마 이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 일이란 지나고 나면 추억 놀음을 하게 되는 법이어도 현재 진행형인 상태에서는 결코 농담이 되지 못한다.

어쨌거나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한 듯 하다. 이년 즘 지나고 나니 청소 전문가가 되어 있더라. 시간을 단축할 줄 알게 됐고 사람을 부리는 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찬란한 시절은 자의가 아닌 천명에 의하여 무 자르듯이 하루 아침에 그만두게 됨으로써 막을 내린다.


딸아, 나는 네가 몇 살 즘 되었을 때 네 부모의 청소부 시절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내가 그 때의 이야기를 할 때 ' 너무 힘들었다 정말 가난했다 네 아빠가 진짜 싫었다' 이런 말투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몇 년 전만 해도 그 때의 이야기를 하려고 치면 그런 말로 끝내려는 의도가 내 안에 분명 도사리고 있었어.

젊음은 인생 최고의 사치품이기에 버릴 몸과 탕진할 젊음을 마음껏 소비해야 본떼가 나는 법인데 나는 내 젊음을 그렇게 허투로 쓰지 못해서 화가 났던 것이다. 내가 여전히 젊었기에 탕진하지 못한 나의 젊음이 너무 아까워서 나는 그렇게 화가 났던 것이야.


그 때보다 다소 늙은 나는 이제 너에게 부모의 노동을 담백하게 그리고 젖은 눈동자로 응시하길 바라는 마음을 비춘다. 저 아이러니한 자세는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가장 어려운 자세가 될 것이다.

청소부를 졸업한 후에도 네 아빠와 내가 거쳐간 밥벌이는 도전의 연속이었고 빈번하게 마주한 난관들은 청소부 시절의 노동에는 비할 것도 없이 어려웠다. 그렇지만 청소부 정신은 우리 둘의 삶의 자세를 지배하는 기저같은 것이다.


이 땅에서 모든 것이 불가능해졌을 때 다시 돌아갈 곳이라 해야할까. 다시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아니 어쩌면 더 잘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라 해야할까. 모두가 자는 시간 청소기를 등에 매고 벌레처럼 도시를 기어나니던 수치심, 졸린 눈을 비벼 새벽 두 시면 길을 나서던 휘청거림 그것들은 네 아빠와 내가 오롯이 나눠가진 경험이다. 너는 절대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평생 모를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너에게 그런 비슷한 날이 올 수도 있을텐데 ... ... 그렇다면 딸아, 충분히 괴로워하며 직면하여 싸우고 나가라.


세상 가장 곱게 자라길 바라면서도

세상 가장 어두운 곳을 피해가길 바라면서도

내가 너에게 물려줄 것이 이토록 분명하다는 사실에 나는 처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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