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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Aug 08. 2020

딸아 '부캐'를 가지렴

놀면 뭐하니

너와 나 그리고 너의 아빠는 토요일 7시 30분이 오길 기다린다. 우리 가족이 보는 한국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를 본방사수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저녁엔 치킨을 픽업해오거나 회를 떠오거나 여하튼 우리 식구가 맛있어하는 음식을 준비한다. 요리를 좋아하는 나도 토요일 저녁시간은 자유를 가지게 되니 되도록 손이 덜 가고 밖에서 사올 수 있는 음식을 선택한다. 오늘 메뉴는 케이준치킨과 치즈볼 그리고 언제나 옳은, 떡볶이.


너는' 놀면 뭐하니' 에서 시도하는 대부분의 챌린지를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르페우스를 가장 좋아했었다. 내가 느꼈던 감동과 네가 좋아했던 즐거움이 같은 맥락의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네가 춤추고 노래하는 유산슬이 아닌 하프연주에 도전하는 유르페우스를 좋아하는 것은 상당히 의외였다.

너와 내가 '부캐'라는 단어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 것은 그 이후였던 것 같다. 나는 심지어 부캐가 결혼식 신부가 던지는 부케를 뜻하는 줄 알았다. 부케를 던져서 역할을 넘겨 받는다는 은유라도 되는 줄... ...


치킨을 먹는 시간 ,셋이서 함께 웃는 시간은 잘도 간다.

너는 그 시간을 패밀리타임이라고 부르겠지만 사실은 나와 너의 아빠는 숨어 있는 시간이다.

날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가짜의 틈 속에 숨어 킬킬거리는 중이라는 걸 너는 모를테지.


딸아, 내가 '놀면 뭐하니'를 너와 나란히 앉아 보면서, 양 손으로 치킨을 뜯으며 그 기름진 손가락으로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열심으로 부연설명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네가 부캐의 본질을 이해하기 바랐다.

아직 너는 저 사람이 유산슬도 되고 유르페우스도 되고 유드레곤이 되는 흐름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캐릭터가 자꾸 바뀌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착각하고 망각하며 또 새롭게 도전하고 기쁨을 얻고 좌절한다. 앞에 했던 일을 모른척하고 또 애써 그러려고 노력하는 그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너는 오래걸렸다. 서사이길 기대하고 자꾸만 앞뒤로 연결하려는 자세는 혹시 나에게서 나왔을까.

그래도 이제는 제법 저 사람의 자세를 받아드렸다. 어제는 가수였는데 오늘은 치킨을 만들어 파는 저 사람을, 여러 가면을 벗었다 썼다하는 저 사람을 이제 너도 인정하기 시작했다. 납득이 되지 않았는데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본캐인 유재석씨가 버젓이 그렇게 행하기 때문이다.


딸아 부캐를 가져라.

살면서 본캐만으로 살아가기에 세상은 너무 넒고 할 일은 아주 많다 같은 그런 광고 카피 같은 이유는 아니다.

나는 네가 여러 부캐를 키웠다가 하나씩 꺼내 쓸 때 느끼는 자유를 가지길 바란다.

그 자유 안에 네가 숨을 수 있기 바란다.


나는 문학을 사랑하고 탐닉하고 늘 그 안에 숨어있다가 나오곤 했다.

유명작가도 아니고 누군가 내게 소설을 써달라 돈을 주지도 않지만 부지런히 쓴다.

그렇게 쓰는 작가로서 행위할 때 나는 자유를 느낀다.

그러나 사장으로서 돈을 헤아릴 때, 장사가 되지 않아서 품은 마음을 버려야 할 때, 나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 잔인해질 때, 사흘 밤낮 울어야 할 때 어쨌거나 저쨌거나 생업을 위해 직업인으로서 세상과 싸워야 할 때 나는 상상력이라는 것을 발휘할 수 없다. 몽상을 품었다가는 내 코가 베어나간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생업을 위한 본캐는 가장 중요하다. 나는 밥을 벌어먹는 행위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그것이 없다면 나머지는 할 수 없이 무위하다고 믿는다.


상상력은 빈곤해지고 발 딛은 순간으로부터 한 시도 벗어날 수 없으며 풍경 너머 지나가는 것들에 무덤덤해질 때 너는 언젠가 절망할 것이다.

그 때에 너는 숨을 곳이 있어야한다. 본캐를 잠시 버리고 부캐를 건져 숨어야 한다. 그것은 네가 평소에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딸아 부캐 역시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고 돈 주고 산다고 얻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깊은 성취감이 동반 되었을 때만 너에게 지속적으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취감은 쉬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현대 사회는 여러 가면을 가지고 살아야 트렌디 하다고 말한다만 나는 그런 사회적 행태나 그로 인한 기능을 너에게 말하려는 뜻은 아니었다. 또 한 편에서 우려하는 이 상황, 꽤나 디오니소스적으로 몰고가는 현대사회의 삶의 양식에 대한 비판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캐를 가진 삶을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싶다.

너에게도 권하고 싶다.

한 인간이 숨어 있기 좋은 방을 스스로 만들 줄 안다는 것은 꽤나 근사한 삶의 방식이라는 걸 미리 알려주고 싶다.


글은 쓰는 목적에 따라 문체도 변한다. 문체의 특징이 강한 사람은 소설이나 편지글이나 심지어 뉴스 기사까지 같은 체로 쓰기도 한다만 그런 사람들조차도 미세한 표정의 변화는 있다. 그 때 글쓴이들은 글 뒤에 숨어 희열을 느낀다. 소설의 인물이 다양하면 더 큰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그것은 이미 멀티페르소나 혹은 여러 개의 부캐를 쥐었다 놓았다 하는 심리와 비슷할 것이다.


나도 너와 사는 동안 부캐로 버텼다고 알린다.

엄마로서의 나와, 글쓰는 자로서의 나 그리고 사업장에서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밥벌이 수단이었던 가르치는 자로서의 나도 내 안에 머물러 있어 그것 역시 내 것이라 믿는다.

나는 그것들의 간극에서, 끝도 없이 벌어지는 틈 사이에서 여전히 유영한다.  

그래서 충분히 자유했다.


딸아, 단 하나만 고르는 우를 범하지 말아라.

욕심이 화를 부를지라도 즐길 수 있는 방법도 곧 배울테니.

파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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