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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May 03. 2020

찬 물에 만 밥엔 오이지

<아주 조금, 젊지 않은 여자에게 >

소설 <아리랑>에는 '징게 맹갱' 들판이 나온다. 김제, 만경의 평야를 부르는 전라도 사투리다. 최대 곡창지대인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은 배를 곯다 울고 살 수 없어 떠난다.

'찬 물에 만 쌀밥에 식은 고등어자반을 올려' 먹고 싶어하던 남자가 있었다. 그 식욕은 하와이 노예로 팔려간 자의 그리움이었는지 징게 맹갱 허허 벌판 가운데 내 땅이 한쪽도 없어 슬퍼하던 자의 통곡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남의 땅을 빌어 뼈를 갈며 일하던 자가 결국엔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어 흘리던 눈물이었는지 영혜는 분명하지 않다.


밥을 물에 말아 먹을 때는 갓 지은 쌀밥을 한 소끔 식힌 후 찬 물에 마는 것이 좋다. 갓 지은 쌀밥이 여전히 구수하고 찰기가 남아있을 때 물을 부어야 한다. 그러나 따뜻하거나 미지근한 물을 밥에 말아버리면 밥알은 금새 배로 불어서 찰기가 떨어져버리고 게다가 밥알갱이 사이 사이에 물이 흘러내리는 공간이 남아 있지 않게 되기 때문에 찬 물을 부어야 한다.

입 속에서 차가운 밥 알갱이가 저마다의 공간을 확보하여 굴러다닐 때 짭조롬한 고등어 살 한점은 구수한 밥맛을 그만 멈추게한다. 첫 술에 맞이하는 차가운 밥알과 짭짤한 고등어는 서로가 가진 감각의 최대치를 극대화시킨다. 차가움은 짬을 선명하게 하고 짬은 차가움을 찌르도록 한다. 젖은 밥과 고등어는 입 속에서 사이좋게 대유법을 지키다가 서서히 무너진다. 젖은 밥이 먼저 끝날지 고등어가 먼저 끝날지 늘 예상하지 못한다.

소설 <아리랑>에서 흐르는 눈물은 결국 저 젖은 밥 안으로 흐른다. 하와이 이주 노동자와 만주 독립군과 그리고 미처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모두의 눈물이다. 축축하고 짭찌름한 그 맛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영혜는 오늘 엄마에게 소포를 받았다. 쌀을 앉히고 돌아선 오후 네시가 살짝 넘은 시각이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오는 우체국 5호 소포박스에는 엄마가 들어있다. 배송료 13만원을 내고 영혜 딸의 운동화와 팬티, 조미김, 돌김, 국물다시용 다포리, 고춧가루 , 엄마가 만든 멸치볶음, 오이지, 진미채, 취나물덖음 이런 것들이 왔다.

영혜는 오이지를 꺼낸다 가장 먼저. 밀봉되어 개별 포장된 오이지는 모두 열 묶음이었다.

오이지는 소금물에 절여지는 간도 중요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무치기 직전 오이를 썬 후 물을 빼는 작업이 가장 중요하다. 보통은 손에 꼭 쥐고 오이지를 빨래 짜듯 짠다. 이 작업은 손을 매우 아프게 한다. 소금물이 닿으면 따갑다. 오이지를 오래 먹으려면 설렁설렁 짤아서는 안된다. 소금물이 오이에 남아 물컹거리면 안된다는 뜻이다. 오이에 스민 소금물을 최대한 꼭 짤아내야 오이가 쫄깃하고 씹히는 식감이 마지막 조각까지 변함없다. 그러나 열 팩 정도 되는 오이지를 만들려면 손으로 짤 수 없다. 엄마는 오이의 소금물을 짜는 기계와 해외배송에 안심하고 보낼 수 있게 밀봉하는 기계도 샀다.

영혜는 막 뜸을 마친 냄비 밥을 한 그릇 떠서 후우 하고 김을 크게 불어낸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콸콸 붓는다. 밥보다 물이 많아지도록 그득 붓는다. 엄마의 오이지는 참기름이 듬뿍 묻었고 깨소금이 잔뜩 뿌려져있다. 소금물의 간이 맞춤이었는지 짠맛은 깊이 숨어 있었다. 한 조각씩 덜어 물에 만 밥 위에 올릴 때마다 참기름이 붉은 이랑을 만들어 퍼뜨렸다. 함께 입 속에 밀어 넣어도 그 쫄깃함은 유별나게 도드라져서 혀는 금방 골라내어 따로 씹게한다.

영혜는 일부러 힘껏 씹었다. 징게맹갱 평야보다 더 멀리 있는 딸을 생각하며 힘주어 오이지를 짰을 엄마를 생각하며 꼭꼭 씹었다. 그리고 예감했다. 오늘 밤 식구들이 모두 자러 가면 작은 등 하나만 켜놓고 홀로 부엌에 선 채로 한그릇 더 먹을 것이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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