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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Feb 18. 2022

미세스 홍의 장례식

뜻밖에도 장례식장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났다. 정면에 그의 웃는 사진이 있었고 그의 남편이 사진 아래서 울고 있었다.

이민 사회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고갯길을 넘어가고 있던 중에 장례식에 다녀오자 더더욱 모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를 조롱하던 자, 그를 흉보던 자, 그를 싫어하던 자와 그가 미워하던 자, 그가 흉보던 자가 한데 어울려 ‘일’을 하고 있었다.

호주식의 퓨너럴과 기독교 추모예배가 혼재된 한국인 미세스 홍의 장례에는 그야 말로 모든 것이 뒤범벅된 공기가 느껴졌다.


이민 사회에서 십 년 간 살면서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기의 스탠스를 일관되게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제 A가 나에게 격렬하게 b에 대한 험담을 했는데 오늘 A와 b가 팔짱을 끼고 가는 경우를 직면할 때 나는 표정관리를 잘 못한다. 싫으면 티나게 싫어하고 좋은면 가열차게 좋아하는게 낫지 않나? 나는 A의 칼 같이 비판적인 안목을 믿어야 할 지 다음날 용서해 줄 수 있는 관대함을 인정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세상에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옛 말씀이 이민 사회처럼 성공적으로 실현되는 곳도 드물 것이다.


아마도,

아마도 갈 데가 없어서 그런 것 아니겠냐는 결론을 이 곳에 산 지 십년이 지나서야 내게 되었다.

갈 데가 왜 없냐고, 이왕 외국에 가서 사는 거 현지인들하고 친구하고 살아야지 왜 굳이 한국사람들 사이에 틀어 앉아 싸우고 배신하고 상처받고 그러느냐고 제발 바깥으로 나오라고. 그런 소리 분명히 하시겠지만 영어를 아무리 지껄여도 그것은 말일 뿐이지 마음이 아니라는 걸 여기 사는 사람들은 다 안다.

우리는 이 틈바구니 안에서 경쟁하느라 시기하고 누구 엄마가 땅 사면 배 아파하고 그래도 내일 그 엄마랑 이야기하면서 노하우를 듣는다. 한국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하고 생활 양식이 비슷하다. 다만 그것이 공간적 이음새가 아닐 뿐이다.

우리는 각 지역에 점으로 퍼져 살면서도 점을 잇듯 줄을 대어 산다. 쓰레기통 내놓을 때 가끔 만나는 옆 집 사람, 몇 번 못봤는데도 언제나 생글생글 웃는 나이스한 그 사람 이름이 뭔지 모르면서 이십킬로미터 떨어진 한국 식당 K 사장의 골프 핸디 갯수와 그 집 아이가 일주일에 몇 번 바이올린 레슨을 하는지 그의 부인이 최근에 무슨 미용실을 다니는 지는 꿰고 있다.


그러고 보면 언어는 얼마나 중요하고도 하찮은가.

언어를 찾아 헤매면서도 언어로 빚어진 것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마음을 줘버린다는 것은.

한인들은 그렇게 모여서 서로 배 아파하고 또 경쟁하고 질투하면서 산다. 그런 말은 모두가 알다시피 극도로 가벼워 쉽사리 건너가고 가는 길에 가시가 돋고 칼을 숨겨도 책임지는 이가 하나 없다. 내가 아는 사람은 소문 속에서 바람이 두 번이나 났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대신 변명했더니 그 속을 누가 알겠냐며 아무도 모를 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가짜 뉴스를 만드는 사람이 꼭 악의가 있어 작정을 하고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약간 더 재밌으려고 대화 중에 조금 더 극적인 효과를 주려고 아차 하다 밟는 노선이다.

미세스 홍의 장레식은 그렇게 끈끈하면서도 건조했다. 유가족과 친구, 교회 사람들,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들이 한데 모였다. 유가족 대표가 편지를 낭독할 때 너나 할 것없이 다 울었고 (미세스 홍과 밥을 딱 한 번 먹은 적이 있는 나도), 그의 친구들이 나와 고인이 평소에 좋아하던 노래를 불렀을 땐 노래를 너무 못 부르는 바람에 갑자기 분위기가 산만해졌으므로 아무도 울지 않고 밍숭밍숭하게 쳐다봤으며, 생전에 미세스 홍과 자주 각을 세우고 돌아서서 험담하던 사람들이(대체 누가 그런 조합을 꾸렸는지 신통할 따름) 퉁퉁 부은 눈으로 돌아가는 조문객들에게 떡을 나눠주는 봉사를 했으며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곳에 있던 우리 모두가 줄을 서서 헌화를 했다.

부조리한 상황극 같은 장례를 지켜보며 이 곳에 모인 사람들, 즉 교민 사회(결단코 이 곳에 사는 우리는 이런 단어를 입에 올리지도 않지만)가 어마어마한 씨족 공동체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당장 미워도 저 애를 보낼 데도 없고 내가 갈 데도 없어 살 부대끼며 살아야하는 현실, 또 그렇게 이십 년 즘 살다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그 구석, 예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드리고 사는 모양새다. 이해못할 족속이라고 혀를 차면서도 만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의 길 앞에서는 평생을 주고 받은 갈등일랑 한 순간에 멈추고 모여 앉아 ‘일’을 치러낸다. 일 치른 뒤 또 다른 국면이 이어질 지 모르겠지만… …


나는 왜 아직 그게 안되는 것일까.

몇 달 전 인간관계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실망을 한 후 나는 그들을 용납하지 못했다. 마주치지 않으려 도망 다녀야 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건너서라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랬더니 나의 생활 반경은 너무나 좁아져 버렸다. 겨우 두 사람과 불편해졌을 뿐인데도 세상 끝에 내몰린 듯 느껴진다. 어제 오늘 150KM를 운전할 만큼 바쁜 일정을 소화했고, 내 직업에 관련된 일처리를 하는 동시에 엄마로서 아이의 스케줄을 서포트 하느라 멀티 태스킹을 끊임없이 해야했다. 그렇게 바빴던 반면 남편과 아이를 제외하고는 한국 사람은 단 한 명도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 외엔 누구와도 대화한 적이 없었다. 카톡으로 서울에 있는 친구와 몇 마디를 주고받긴 했지만 입 밖으로 내는 대화는 아니었다. 그랬더니 마치 아무도 모르는 곳에 던져진 후 아무데도 나가지 않은 사람처럼 고립된 느낌이 내내 들었다.

미세스 홍의 장례식에 온 사람들은 이 곳에 이십 년 혹은 삼십 년 가까이 살면서 내가 했던 경험들을 적어도 한 번은 해보았을 것이다. 반면 내가 아는 어떤 부부는 한국 사람들끼리의 부대낌이 싫어서 성도 이름도 영어로 바꾸어 한국 사람과는 일절 교류하지 않고 살기도 한다. 교민 사회의 한복판에서 말과 싸우며 사는 사람이나 교민 사회를 떠나 고립된 사람들이나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선택했고 삶을 운용했을 것이다.

나는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양쪽을 다 이해하겠는 입장에 섰다. 미세스 홍의 장례식에서 그 순간만큼은 한 마음으로 울던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아주 나쁘지만은 않다 여긴 것이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선택이라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누구도 내게 강요한 적도 없는 일이다. 잠시 내가 여기서 멈춘 이유는 내 몫으로 가진 상처를 가만가만 밟아가는 중이기에. 단지 그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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