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나 Aug 13. 2021

연애 선호 사상

기억은 생각보다 쓸모가 있소

딸아,

내가 여물어 가는가보다.

내 인생이 어떤 모양새인지 생각을 기울이는 시간이 길어졌으니.


내 인생이 전적으로 쓸모있고 아름다웠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너를 낳아서 기른 일은 엄연하기에  그토록 무용하지는 않았다 위로한다.

너를 낳느라 나와 네 아빠는 열심히 연애하고 사랑했다. 너를 낳고 산후우울증을 앓았을 때는 뜨거웠던 연애가 무위가 된 것 같아 절망하기도 했었는데 앓는 시간은 다 지나가고 말았다.

이후에 나는 네 아빠와 놀았던 연애의 시간을 곱씹고 살았고 그 덕에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결혼할 때 어떤 마음을 품고 시작했었느냐 질문을 받으면

나는 늘, 단 번에 대답할 수 있었다.


"이 사람과 함께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재밌을 것 같아."


그 때 내 주위에 어른들은 모두 나를 한심해 했지만 이십대 의 나는 그게 한심한 소린 줄도 모르고 해벌쭉 웃었다.


아빠와 나는

헤어지는게 싫어서 밤 열두시에 헤어졌다가 새벽 세시에 다시 만났다.

네 아빠는 늘 택시를 타고 달려왔고 나는 새벽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내 방 싱글 침대에서 잠을 자도 좁다 생각을 한 번 안했었고 더 가까이 밀착하는 일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라 여겼던 시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때의 시절일기는 밤이 전부다.

결혼식을 앞에두고 근사한 프로포즈도 없었고, 반지 하나도 나눠끼지 못하고 지나왔어도  그 일이 그렇게 서운하지도 아쉽지도 않아.

나는 네 아빠를 많이 좋아했다.

네 아빠의 탄탄한 가슴과 치기어린 다짐과 저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경솔함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

젊은 날의 사랑은 그래도 되었었다.


어제 운전을 하고 가다가,

그 좋은 해를 고스란히 받으며 달리다가 그만 젊은 날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느껴버렸다. 그로부터 겨우 십여년이 지났을 뿐인데 우린 많이 달라졌거든.

네 아빠와 나의 몸은 중력을 이기지 못한 채 흘러 내리고 있고, 서로의 입냄새를 영민하게 피해가게 되었으며, 알몸을 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채, 생리 현상을 자연스러이 통과시키고 산다. 그 삶은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하지만  더 이상 젊은 날에 부렸던 사랑에 대한 열정 같은 것은 없다.

대신 우리는 상대에 대한 의리가 생겼고 너를 보호하겠다는 끈끈한 동맹이 있으며 서로가 편안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눈이 있다.

뜨거웠던 젊은 날과 편안해진 지금 그 간극을 짚어보다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 때와 똑같은 것 같은데 나의 주변은 같지 않다는 것이 조금 슬프기도 했다. 철저히 착각일지도 모른다만.


네가 세상에 생기기 전

네 아빠와 나누었던 뜨거웠던 날들을 반추하는 일은 내게 은밀한 즐거움이다. 네 아빠가 있기 전 나를 다녀갔던 사랑을 복기하는 일 역시도 그렇다.

그것은 내가 너의 엄마가 아닌 한 인간으로 살면서 불현듯 나타나는 유혹을 이겨내는 힘이기도 하고, 짓누르는 외로움에 굴복되지 않는 다른 길이기도 하다.


네가 사랑할 만한 사람을 찾아내는 눈을 가지기를 바란다.

그 눈으로 찾아낸 자와 열심히 사랑하고 오래 뜨거웠으면 좋겠다.

인간이 백년을 살 수도 있다하는데 그 중에 너의 몸을 뜨겁게 덥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사랑은 너무나 짧게 오고 쉬이 간다.

다음을 기약하지 말고 지금 열심히 사랑해라.

다소 어리석은 날들이라 여겨져도 괜찮다. 지나가면 그 기억이 생각보다 쓸모 있을 거란 걸 엄마는 장담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르는 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