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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ggy Poo Oct 07. 2023

감정의 소용돌이가 잠잠해질 때까지

  응급실 근무는 확실히 감정노동이다. 끙끙 대며 앓고 있는 환자들의 감정과 당황하고 슬프고 화가 난 보호자들의 감정까지 모두 받아주어야 한다. 쉴 새 없이 그 감정들을 모두 받아주고 나면 한없이 우울한 기분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세상에는 힘들고 슬픈 일만 있는 것이 아닌데 마치 이 세상은 고통뿐인 것처럼 느껴진다.

  슬프고 힘든 마음은 다독이고 위로해 주면 되지만 환자나 보호자가 화를 낼 경우에는 상황이 복잡해진다. 그 이유가 의료진의 불친절이나 실수 때문이라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된다. 그러나 화가 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거나 납득이 되지 않을 때에는 종종 마음이 무너진다. 지난번에 목이 아프목소리가 쉬었다며 어르신 한 분이 응급실로 오셨다. 이런 경우에 간단히 목감기약만 처방할 수 도 있다. 나의 입장에서도 그냥 먹는 약만 처방하는 것이 편하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는 기도가 막힐 수 있는 후두개염 같은 응급질환일 수도 있어서 나는 잘해드리려는 마음에 x-ray를 찍어 기도의 상태만 확인하고 주사와 먹는 약을 드리겠다고 했다. 환자도 수긍하여 x-ray를 찍고 난 후 이상 없음을 환자에게 설명하고 주사와 먹는 약을 처방했다. 그런데 간호사가 주사를 가지고 환자에게 가자 환자가 갑자기 주사를 맞지 않고 집에 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해가 안 되어 환자에게 다시 가서 설명을 했지만 환자는 막무가내였다. 환자는 화가 나 있었다. 왜 화가 난 것인지 물어봐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x-ray 검사가 필요하는 것과 결과가 이상 없음을 설명했고 이제 주사를 맞고 먹는 약만 받아가면 되는 것인데 환자가 왜 화가 난 것인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러 번 설명을 하고 설득을 했지만 환자는 민원을 넣겠다며 내 이름을 적어가고는 먹는 약도 받지 않고 진료비만 내고 귀가했다.(그러나 민원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실랑이를 할 시간이었으면 벌써 주사를 다 맞고 귀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모든 서비스업이 그렇듯이 의료는 선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환자가 진료비를 내지만 아무리 비용을 많이 내겠다고 한들 의료진이 진료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 환자는 치료를 받을 수 없다. 이것은 음식점부터 미용실까지 우리가 모든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이유이다. 내가 선의를 가지고 무엇을 하였는데 환자나 보호자가 화를 낼 때에는 한없이 기운이 빠진다. 무언가를 잘못하여 화를 낼 때에도 힘이 빠지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에는 더욱더 그렇다. 이런 일을 몇 번 겪고 나면 나는 왜 선의를 가지고 진료를 해야 하는 것인지 동기를 상실하고 허무함에 휩싸인다.

  나는 그동안 응급실에서 일하면서 이런 사건들이 쌓여 나의 삶이 붕괴되지 않도록 스스로 보호하는 법을 익혀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좌절스럽고 허무한 감정에 오래 빠져있지 않도록 끊어내는 것이다. 그 사건을 계속 떠올리고 되뇌어봤자 나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 사건에 대한 기억도 흐릿해지고 감정도 옅어질 것이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나가고 잠잠해질 때까지 그 사건에 대해 생각하지 않도록 나의 생각과 마음을 돌려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감정에 나의 에너지를 쓸데없이 쏟게 된다. 이런 사건을 되뇌고 감정을 곱씹는 것은 나의 소중한 인생에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럴 때면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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