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가 지워진 자국
지워진 자국에서 길을 잃은 나의 아버지
벽보엔 종이를 뗀 테이프 자국들만
종합건축 간판이 붙은 사무실의 머리가 희끗한 사내는
고물을 모으고 형광등을 분리하고
집이 있던 자리엔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
성인 PC 게임장의 환풍기만 돌고 있고
퐁퐁 물 떠다니던 똥개천은 길이 막혀
더 이상 흐르지 못하고
점을 보러 오지 않는 신당을 모신
골목의 집들만 가득
고양이는 굶주림을 툭툭 건드리며 놀고 있고
갈라진 아스팔트 바닥에는 비가 말라버린 자욱
신은 어디로 내리는가
갈라진 것들의 그 틈새로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켜진다
나는 내일을 만지며 걸어본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들 사이를
부러 불필요한 옛 동네를 지나쳐
가시나무의 가지를 또 뻗어내고
악몽에서 만났던
학교로 가는 오르막을 오른다
창이 뺨을 때리고
급식실엔 막 점심을 마친 식판들이
서로의 몸을 긁고 핥아대는 소리가
분주한 이모의 손목 너머로 들려온다
자란 앞머리가 내 눈을 가리고 있다
커튼이라도 하나 장만한 듯
나는 아무것도 없는 길을 자꾸 열어젖히며
끝으로 끝으로 가닿으려 한다
끝이 달아나겠다고?
그럼 나는 끝이 되면 되지
언제나 나는 끝이 되어서
도달할 수도 없는 이미 도착해버린, 버려진 역들을 핥는
또 한 마리의 들개의 눈을 가진
당신의 사랑스러운
폭력으로 빚은 아이
그런 골목의 아이
그런 골목들의 타인
그런 골목의 까마귀
그런 골목의 빛과 그림자
피가 너무 폭력적이어서 은유를 짓는 법을 까먹었고
내 품에는 너에게서 훔쳐 온 단 향이 나는 담배가 있다.
나는 그것을 붙이지 못할 손목으로 적어 내려갈 뿐.
공원의 노인 둘이 오늘 걸은 걸음 수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여기 한 바퀴면 팔천 보니 나는 오늘 이만 이천 보를 걸은 셈이지,
작은 새들이 소리로 공원의 머리를 쪼아대고
나는 가슴을 그늘처럼 꺼내 볕이 들어오지 않는
공원에 펼쳐놓고 그림 공부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