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왜 작은 살구나무 같을까
해방촌을 내려와 후암동을 지나 서울을 걸었다. 독립서점에선 언젠가 술에 취해 잃어버린 책 한 권을 다시 샀다. 그 이름의 그 책은 팔리지 않는 건지, 아니면 잘 팔리는 것인지 일 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아니 더 많이 있었다.
소월로를 따라 모르는 서울을 걸었다. 모르는 서울은 모르는 서울이었다. 늘 변두리 먼발치에 서서 보행 신호를 기다리며 보던 숭례문도 그 속을 한 번 지나쳐봤다. 구경을 하러 온 사람들의 눈이 곧 저물어갈 해처럼 반짝였다. 광화문이 가까워질수록 서울의 광장은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띠를 두르고 전봇대만큼이나 긴 깃대를 들고 투쟁을 했다. 거기 허름한 노숙자 몇몇을 앉혀놓고 정의가 뭔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정의를 외치게 했다. 마음속에선 알 수 없는 피가 끓어왔다. 주말의 서울 광장은 그렇게 시끄러웠다. 나는 나의 투쟁 속에서 잠깐 끓다 사라지고 다시 걷고 있었다.
정동길의 은행잎은 스러지고 있었다. 꼭 마지막인 것처럼 찾아온 사람들이 붐볐다. 거기 햇살이 내리는 담벼락에 서서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고 기념 촬영을 하는 가을의 신부와 신랑은 이쁘고 아름다웠다.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을 터뜨리고 이쁘다, 맑게 웃으며 지나갔다. 그래 정동길은 밤이 아니고 낮에 와야 했다. 어느 노래 가사 정동길 교회당처럼 낮에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사라져야 했다.
언젠가 술에 취해 서 있던 서점에 선다. 그곳엔 취하지 않은 기분이 남아있다. 손을 닦고 눈에 쌓인 먼지를 물로 씻어내며 거닐고, 어딘가를 들어갈 수 있는 하루에 대해 생각했다. 어린 여자아이가 아빠를 따라 손을 씻는다. 줄이 긴 변기 칸에서 많은 외출과 불편들이 참고 있다. 그렇지만 외출인 것들. 시집을 찾으며 잠깐 문장 하나가 스치고 갔다. 너는 왜 저 작은 살구나무 같을까,
너는 왜 저 작은 살구나무 같을까
노래가 끊어진 보육원의 살구나무,
잃어버린 책은 어떻게 찾지 문득
길을 헤매다 보면 얼굴을 씻다 보면
사라졌다고 믿었거나 사라졌거나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림자들이
벽에 쓰러져서 나를 보고 있었다
봄에 작은 바구니에 담기기 위해
터져버린 살구가 되어서 가을을
그리고 차가운 무언의 겨울을
버티던 살구나무의 두 팔
하얀 서점의 책장에서 책을 꺼내면
몇 편의 편지들이 있다
이름도 없고 주소도 없는
그러나 수신인만 있는
나는 몇 해의 계절을 그림자처럼
벽에 쓰러져 세상을 어둡게 따라다녔는지,
같이 살구를 입에서 짓무르던 너를 보면
꼭 울어버릴 것 같다
막차의 버스 창가에서
저무는 저녁을 보며 어디에선가 굴러떨어져
하수구로 들어가는 동전처럼
몸을 퐁 담그고
꼭 그것들과 잠긴 몸, 다 같이 울어버릴 것 같다
그렇지만 너는 왜 저 작은 살구나무 같을까,
나와 어느 한편에서 살아왔던 너는 왜 살구나무 같을까
네가 다 웃는 모습이 내 입속의 살구 열매 같을까
보육원 4동 나무 둥치에서
우린 그림자가 될 때까지 놀았다
그러니 너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니,
나처럼 공단에서 쏟아지고
나처럼 강물 위를 거닐고
나처럼 깨지 않는 잠을 붙들고 심야의 영화를 봤니
너의 살구 냄새는 나를 왜 따라다니니
우리의 살구 냄새는 왜 그곳을 따라다닐까
청계천에 발을 내리고 앉아있던 저녁들은 꼭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쏟아지지 못한다고 믿었으나 세상에 자주 쏟아졌을 것,
절뚝이는 러시아인의 저 다리처럼
그러나 스러지지 않는 살구나무처럼
발 냄새나는 살구나무처럼
웃고 있는 그 살구나무처럼
하얗고 검은 책장을 넘긴다
온통 표지가 나인 것들이
길을 비키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