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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팔이 누나 May 09. 2022

안일하게 살기로 했다

승진, 결혼, 주식과 자체적 거리두기 실행 중

Yes No Maybe?

세상 가장 피곤한 월요일 퇴근길, 집에 가고 있는데 오랜만에 첫 회사 동기 오빠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오랜만에 걸려오는 전화는 반가움과 동시에 왠지 모를 두려움이 동시에 들고는 한다. 반가움은 말 그대로 오랜만이기에, 나를 잊지 않고 찾아주기에 오는 반가움이고 두려움은 연락이 닿지 않았던 시간 동안 이야깃거리가 될만한 무언가를 축적하지 못한 나의 모습을 상대에게 얘기하며 나 스스로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고민 끝에 받은 오빠의 전화는 매우 반가운 목소리였다. 남자 목소리에도 솔 톤이 있다면 오빠의 목소리 느낌이랄까? 잔뜩 신난듯한 그의 전화는 분명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나의 근황을 몇 가지 두들기더니 아니나 다를까, 모 회사의 임원으로 가게 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지난 몇 년간 땅 파는 시간을 일부 가진 후에야 비로소 '남의 성공'을 질투하지 않고 기뻐하게 된 나는 진심으로 기뻐해 줬다. 그리고 여기서 전화가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그래서 너는 요즘 뭐해?'라는 소식에 말년 과장으로 업(UP) 그레이드가 아닌 옆(Side) 그레이드 중인 나의 회사 생활과, 최근에 옮긴 회사의 주식이 작년 대비 2-3배 가까이 떡 상했으나 나는 한주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 남자 친구는 있으나 언제 결혼할지 모른다는 것, 앞으로 이사 갈 집을 알아보는데 예산이 오빠가 생각하는 것보단 1/4 수준이라는 것을 하나하나 얘기하며 나도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나의 현실을 마주하는 과정은 솔직히 좀 괴로웠다.


30대의 친구들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결혼을 했거나 안 했거나,  경제적 자유를 이뤘거나 못했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이르렀거나 평범하게 한 계단씩 올라가거나. 어쨌거나 나는 거의 다 후자인 듯하다. 그럼 내 인생은 Loser 인가? 그렇다고 치기에 나의 삶은 딱히 부족함이 없다. 나는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1.5룸짜리 나의 소형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매일매일이 불편하지 않고, 연봉 후려치기를 당해 입사한 현재 직장에 큰 불만도 없으며, -35%를 찍고 있는 나의 주식이 내 삶을 크게 흔들 만큼 짜증 나거나 고통스럽진 않다.  


어쨌거나 나는 오늘만 살아갈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을 괴로움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욕심내는 나의 이상에 대한 갈망일 것이다. 이상은 한 번에 이뤄지면 좋겠지만 사실 그렇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쉽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비정상적 일정도로 치열함을 부추기는 세상에 No를 외치고 (사실은 정상인데 우리가 잊고 있었던) 안일하게 사는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


조급함의 끝판왕인 난 안일해지기 위해 연봉 6천 미만은 거지라고 일컫는 고액 연봉자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와 잘 나가고 예쁘며 바프를 찍을 정도로 몸매가 좋고 #협찬 #광고 포스팅을 1일 1회 올리는 공구 여신들이 한가득한 '인스타그램'을 끊어냈다. 아니, 사실상 인스타 중독인 상태라 끊을 순 없어서 정신건강에 좋은 자연에 관한 인스타 계정만 팔로윙 하는 부캐 계정을 하나 따로 만들었다.


나는 안일하다, 고로 행복하다. 사실 이 논리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나는 조금(?) 불행했다. 그렇다고 죽고 싶을 만큼 우울증이 오거나 우울감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의 불행은 회사에서 날 짜증 나게 하는 임원들 딱밤 한 대씩 때리고 싶은 충동 정도, 종목 토론 게시판에 시원하게 욕 한번 쓰고 싶은 정도, 윗집의 층간 소음에 올라가서 곽두팔 체로 쪽지 남겨주고 싶은 정도,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나는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나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선택이 없다.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인정하겠어라는 마음으로 나는 안일하기로 선택했다. 동료들에 비해 승진이 늦은 나에게 남은 길은 승진일 뿐이고, 바닥을 찍은 내 주식에게 남은 행사는 찐 반일 테니 나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때때로 밀려오는 짜증이라는 감정은 탄수화물로 해결하기로 했고 미간 주름은 회사 옆 신장개업 피부과에서 3만 원에 행사 중인 미간 보톡스로 손질 보기로 했다.


걱정한들 뭘 하겠어, 이미 쳐 물린 걸.

그러니 오늘도 난 아무것도 안 하느니 책한 장 읽고 글 하나 쓰고 자기로 했다.

다음에 오빠한테 전화 올 때는 분명하게 얘기해야겠다.

'결혼 못함, 이직 성공 못함, 주식 쳐 물림, 밥 사 줄 거 아니면 저거 세 개 빼고 얘기해 오빠!'


내가 여유도 상냥함도 없는 이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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