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형 유빙을 바라보며-
비록 멀리서 바라본 것이지만. 지금까지 다양한 모습의 유빙을 만났다. 너무나도 슬픈 세월호 모양,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생명체인 고래 모양, 도시에 있는 건물 모양, 등대모양, 빙산이란 말에 어울리는 산 모양, 어느 소설 속 마녀가 떨어뜨렸나 싶을 정도의 마법사 모자 모양 등등...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리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서 바라봤기에 아마 특유의 모양이 보였을 수도 있다. 실제로 가까에서 봤다면 다른 모양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것 말고도 너무나도 다양한 모습이 있었다. 사진으로 조차 모든 것을 기록하기 힘들고 하드디스크 용량도 제한적이니 자포자기로 내 머릿속으로 기억하자 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고 머릿속에 그 세세한 모습과 보면서 느낀 그때의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기억할 수는 없다. 기억을 못 하면 아련한 추억으로 남겨두면 되는 것이 아닐까? 추억도 명확하고 선명한 기억이 필요할 때 가능한 것이다. 명확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면... 그것은 망각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런 와중에 매우 단순한 유빙을 만나게 되었다. 적당한 거리에서 윗부분이 평평하게 보이는 매우 반듯한 유빙이다. 정면에서 보이는 모습은 잘라져 나올 때의 울퉁불퉁한 질감이 느껴진다. 그 울퉁불퉁함을 손의 촉각으로 느낄 수는 없지만 눈으로 보이는 그 음영의 모습으로 그 촉감을 느낄 수 있다. 간혹 그럴 때가 있다. 만지지 못할지라도 시각으로 주어지는 그 정보에 의해 촉감이 느껴질 때가. 사실 이런 느낌을 처음 느낀 것은 과거 2011년 11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제25차 남극 세종 과학기지 월동연구대>로 지내면 서다. 당시 우연히 기상대 원가 붉은 노을이 주변의 빙원을 더욱 아름답게 물들이는 장면을 보았다. 기상 대원은 삼촌뻘 정도의 분이셨는데 다양한 경험이 있으셔서 그랬을까? 당시의 느낌을 말해주셨는데 그 뒤로는 나도 점차 그런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감정이나 느낌을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긴 하지만, 사람 간 상호 관계에 의해 전이가 될 수는 있는 듯하다.
나중에 이 곳에도 당시의 경험을 글로 남기겠지만 갑자기 지난 월동 생활이 기억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평평한 유빙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아까보단 멀리 있는 것인지 거친 질감이 시각적으로 확 다가오지 않았다. 멀리 있어서 인지 음영의 구분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좀 더 가깝지 못하여 아쉬움이 크지만 이 유빙이 더 크고 무겁게 느껴진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까 본 것이 쇠고기 한 2-3인분? 에 해당하는 정도였다면 이번 것은 10인분은 돼 보였다. 멀리서 바라보기에 좀 더 얇아 보이고 실제로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도 모르지만 마치 직접 내 눈 앞에서 바라보고 손으로 들고 있는 느낌이다. 갑자기 쇠고기를 생각해서 그런가 배가 고프다. 이런 멋진 광경을 보는 와중에도 이러하다. 어쩌면 평소에 바라보던 느낌이 마치 스테이크 모양과 같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도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아라온의 음식은 훌륭하다. 개인 차이에 따라서 만족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연구활동 함에 부족함이 없는 양질의 재료를 이용하여 훌륭하게 만들어 주신다.
평범한 모양의 판형 유빙을 찍기 때문일까? 조금은 다른 사진을 찍어서 표현하고 싶었다. 망원렌즈를 이용하여 최대한 유빙에 다가갔다. '오오 무언가 꽉 차는 느낌으로 사진에 다 담을 수 없는 규모로 마치 빙벽을 처음 볼 때의 느낌이다.' 예나 지금이나 빙벽을 눈앞에서 바라볼 때의 그 웅장함과 경외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정말 빙벽 앞까지 가서 직접 봐야만 한다. 빙벽으로 다가갈수록 자신의 얼굴이 뒤로 젖혀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저 심심해서 찍어봤는데 정말 빙벽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수평을 맞춰가며 고작 떠다니는 빙벽을 마치 육지에 달라붙어 있는 거대한 빙벽처럼 보이려 애썼다. 계속하다 보니 생각만큼은 아니지만 빙벽 느낌의 사진을 담을 수 있었다. 사실 이런 촬영은 좋아하지 않는다. 나름 속이는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예전에도 비슷한 생각으로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사진을 찍고 편집까지 하여 좀 더 혼란스럽게 보이도록 했었다. 작은 북극여우를 거대한 북극곰처럼... 말이다. 지금 생각하니 참 멍청하면서도 재미난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항해 막바지에 봤던 규모의 유빙에 비하면... 이 크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