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자를 향한 침묵, 말할 수 없는 존재

by 도화민

저번 이야기까지는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온 고민들의 발자취로써, 오랜 기간 동안 다듬어가며 이어진 사유의 여정을 지금까지 함께했습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만든다는,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잘 대해야 한다는 중요한 이야기는 끝이 났네요. 이번 이야기부터는 앞의 이야기들을 준비하며 제가 떠올린, 존재론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만한 재미있는 소재들을 담았습니다. 즉 이제는 소년이 아닌 지금의 제가 들려드리는 이야기입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로 초월자, 즉 ‘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보려 합니다. 특정 종교에 국한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제 종교적 지식이 주로 개신교에 한정되어 있어 모든 종교에 포괄적으로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종교는 사람에 따라 예민한 부분일 수 있지만 누가 읽어도 불편하지 않도록 최대한 가볍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럼 가볼까요?



저만의 작은 존재론의 핵심은, ‘상호 교차 인식이 있을 때 비로소 존재한다.’였습니다. 곧 너와 내가 함께 보면, 그것은 있다는 말이었지요. 반대로 내가 보지 못한다면, 혹은 나 혼자만 보고 당신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없다는 뜻이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이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며 존재를 완전하게 하는 아름다운 이론처럼 보이지만 초월자, 그러니까 신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신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을 빼면, 우리 대부분은 그런 초월적인 존재를 보거나 느끼지 못합니다. 인식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왜냐하면 신은 인식이 아닌 믿음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에 이유와 근거를 찾고자 하는 저와 같은 사람에겐, 믿음만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너무나도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부족한 설명임을 넘어, 제가 가진 존재론에 의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까지도 얻게 됩니다. 상호 교차 인식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보겠다더니,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감히 무신론을 설득하러 온 걸까요?


앞서 표현했듯이, 나만의 작은 철학으로 감히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에 대해 ‘감히’ 논하는 일은 언뜻 오만해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미숙했던 어린 시절이었다면, 내가 만들어낸 이론에 취해 감히 신의 존재 유무를 결론짓는 결말을 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반박하며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다듬던 여정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존재 여부도 감히 딱 잘라 말할 수는 없겠군요. 하지만 확실한 답을 내기 위해서만 치열한 사유를 해야 하나요? 이전에는 존재의 유무를 칼같이 결론짓고 싶어 저만의 철학을 발전시켰지만 오늘에 다다라서는 사유, 나아가 철학은 답을 내기 위한 과학 실험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신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하는 순수한 궁금증이지요.


신의 존재를 논하는 게 가능한가?

논할 수 있다면 어떻게 논할 수 있는가?

논할 수 없다면 왜 그토록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왜 나는 믿지 못하는가?


이러한 질문 끝에 저는 결국 무신론에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보지 못하고 느낄 수 없기에 아무것도 논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신은 없다는 오만한 결론을 전하려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인식하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으니, 일단 제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신이 없다는 말과 뭐가 다른지 갸우뚱하실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는 아마도 여러분이 존재를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7화에 이르는 긴 이야기를 통해 ‘인식’이 ‘존재’를 결정한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이 말을 다시 곱씹어 보면, 우리가 보든 보지 않든 존재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들음으로써 존재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따라서 ‘보고 듣지 못한 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에 근거하여, ‘인식하지 못한 신은 없는 것이다’라는 답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신이 반드시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 존재 여부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지요. 언젠가 제가 죽어 신을 보게 된다면 그제야 신은 존재합니다. 존재는 제게 있어 인식 유무에 상관없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내가 보고 듣게 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하는 개념이니까요. 누군가는 존재를 논하기 이전에,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니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신이 진정 전지전능하고 사랑이 가득한 존재라면, 그 또한 저의 철학을 알고 있을 테니 이러한 사유의 여정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싶습니다. 나아가 이런 철학을 가지고도 맹목적으로 신을 믿는다면, 제게는 그것이 더 오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서 마냥 믿는다면 그것은 진심이라고 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지금까지 저의 이야기를 통해 존재론과 연결 지어 신의 존재에 대해 말해보고, 그에 따라 내린 저만의 겸허한 무신론에 대해 이야기드렸습니다. 거창하게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결론을 한 줄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의 존재는 말할 수 없다.


저만의 작은 답을 또 하나 만들어 냈군요. 답이 없다는 말이 답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러나 이 무력한 결론은 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이는 저만의 답일 뿐이지, 믿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말 또한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이유와 근거로 설명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논리로 무장하고 강인하게 맞서며 살아가기엔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어렵지 않던가요? 논리에 기반한 객관적인 시선은 분명 중요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날카로운 이성이 아닌 믿음으로써 이해해야 하는 일도 분명 있습니다. 세상의 일도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심지어 세상 다음은 또 얼마나 두려운가요. 죽음과 같은 것들 말입니다. 두려움은 곧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지요. 종교는 인식에 기반한 논리적인 답을 주지는 않지만, 믿음으로나마 알게 하여 그러한 두려움을 해결하고 길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저는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답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나의 하찮은 논리와 철학이 담을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와 질서를 믿고, 그 길을 따를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포근한 삶일까요?


그런 포근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끝내 믿지 못했고, 결국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제가 모르는 것을 감히 논하지 않겠다는 치열한 사유의 끝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유의 역경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말 고결한 일이라는 존경을 전하며 오늘의 글을 마치려 합니다. 그건 곧 자기 인식의 한계를 넘어 용감하게 사유하는 사람이라는 뜻일 테니까요.

초월자를 향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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