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기억과 다른 기억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잊고 싶은 기억

by 노랑꽃

2002년 6월 대한민국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공동으로 동시 개최한 월드컵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경기를 치르는 날이면 사람들은 붉은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공원과 식당, 주점에 모여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그날만큼은 아무리 시끄럽고 수선스러워도 기분 나빠하며 따지는 사람이 없었다. 이탈리아와 16강전 경기가 있던 6월 18일. 주위 사람들은 붉은 악마 티와 응원 도구를 챙겨 출근했다. 연차를 내거나 반차를 예약했다는 지인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모두들 양볼에 태극기를 그려 넣고 머리에 뿔 모양 머리띠를 두르고 응원 준비를 하는 시간. 나는 월드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흰색 실크 블라우스에 신사임당도 울고 갈 조신한 검은색 스커트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영 엉성한 모습이 불편했던 그날은 상견례일이었다.


상견례는 생각보다 어색했고, 지루했다. 이미 양가 부모님들은 서로를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어색한 긴장 속에 형식적인 덕담을 나누었다. 어머니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 아버지들은 “네. 네.” 대답을 반복하며 땀을 닦으셨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모두 한 집에 모여 부부젤라 불며 월드컵 응원이라도 했다면 더 친해졌을 텐데 생각할 때쯤 상견례가 무사히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라는 듯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타면서도 형식은 남아있었다.

“먼저 타고 가세요.”

“아유, 아니에요. 먼저 타세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희는 사돈 먼저 가시는 거 보고 갈게요.”

상견례는 양가 부모님들의 실랑이인지 배려인지 모를 작은 소동으로 마무리되어서야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와 우리나라가 2 대 1로 이탈리아를 이겼다는 기분 좋은 소식을 들었지만, 아빠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말없이 심술이 난 듯 굳은 아빠를 보신 엄마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빠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불만을 쏟아내셨다.

“솔직히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성실한 거 빼면 좋은 게 뭐가 있냐?”

아빠에게 내가 대답하기도 전, 엄마는 날 선 반응으로 쏘아붙이셨다.

“난 성실해서 마음에 들어요. 당신 같은 사람하고 전혀 다르니.”

“내가 어쨌다고 왜 나랑 비교를 하나? “

“매일 술 마시고, 욕하고 애들 어렸을 때 어떻게 했어요? 애들 커 갈 때는 돈벌이나 제대로 했나.”

“내가 뭘 못했는데? 내가 언제 술을 매일 마셨는데? 못돼먹은 여편네 같으니라고.”

“애들 학비 버느라 내가 목공소에서, 회사 식당에서 어떻게 일했는지 기억해 봐요! 그리고 언제 술을 마셨냐니? 왜 자기가 한 일을 기억 못 해요?

그날, 우리 집에서는 월드컵 응원보다 뜨거운 말싸움이 일어났다. 26살은 아빠에게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다고 하니 아빠는 내내 못마땅해하셨다. 투정으로 넘길 수 있었던 아빠의 심술이었는데, 과거에 있었던 아픔들이 헤집어져 나오며 감정은 격해졌다. 순간,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빠는 정말 지난 시간을 잊은 걸까? 최선을 다했던 모습도 있었지만, 내 마음엔 아픔이 더 크게 자리 잡혀있다.


엄마가 교통사고로 수술을 하고 병원에 계실 때 아빠는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추운 겨울 동네 입구 구멍가게 앞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술을 마시고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렸다. 기다리다 너무 추울 때면 잠깐 집으로 돌아와 몸을 녹이고 다시 나갔다.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면 시간은 새벽 2시가 넘어있었다. 술에 취해 경운기를 운전하다가 큰 사고를 낼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릴 때, 보이지 않는 경운기가 오고 있는 듯 환청이 들리기도 했다. 엄마는 아빠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목공소에서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일을 하는 동안 무릎을 크게 다쳐 그 후유증으로 한참 다리를 절기도 했고, 전기톱에 동료의 한쪽 손이 잘려 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후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이 아픈 기억이 아빠에겐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그저 그런 기억 중 하나였던 걸까? 아니면, 다 기억하면서 아니라고 부정하는 걸까? 물론 같은 기억도 있었다. 아빠의 경운기로 학교, 병원, 시내까지 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고 즐겁고 행복했다는 기억 말이다. 가끔씩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한결같이 “너희 집 경운기가 제일 많이 생각나. 너희 아빠가 매일 태워주셨는데.” 소리가 빠지지 않았다. 아빠에게 이 기억은 무기였다. 우리에게 서운할 때마다 술에 취해 나오던 경운기 이야기는 가정생활에 소홀했던 아빠의 과거를 덮을 수 있는 유일한 선행이었다. 우리 삼 남매는 항상 좋은 것만 기억하자면서 ‘아빠도 최선을 다했던 거야.’라고 주문을 외웠다. 시간이 지나도 부모님은 서로 다른 기억으로 다투시고 마음 상해하셨다. 이제 노련해진 우리는 두 분의 하소연을 들으며 어느 한편으로 기울지 않고 중립을 지킨다. 삼 남매의 중재로 한결 편해진 부모님은 2주 정도가 지나면 어김없이 전화로 하소연하신다. 오랜 시간 받았던 상처를 잊는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지극히 평범한 상견례였다고 기억하는 남편에게 오랜 시간이 지나 그날의 뒷이야기를 하니, “아닌데. 아버님이 나를 제일 좋아하셨는데.”라며 능글맞게 웃는다. 아이들이 촌스럽다고 하는 우리 결혼식 사진을 보며 2002년 6월 18일 상견례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때 내가 말했다.

“자기야! 우리 상견례 했던 식당 음식이 맛있었는데, 이름이 황토성이었죠? 기와도 참 멋있었던.”

“강화성인데.”

“아······. 자기야! 강화성이 강화 시내에 있었나? 주차장도 참 넓고 좋았는데, 이제 없어져서 아쉽네.”

“거기 경기도였는데. 강화 가는 길목.”

“아······.”

“아니, 도대체 당신 그날 누구랑 상견례 한 거야?”

내가 아빠를 닮았나 보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없다. 아빠가 잘못을 인정 못하시는 이유는 모르는척하는 게 아니라 나처럼 기억나지 않아서일 것이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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