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보인다는 건 그립다는 거야

행복했던 일 슬펐던 일 모두 그리움보다 추억으로

by 노랑꽃

자주 꽃 핀 건, 자주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나는 하얀 반팔에 여름 하늘보다 파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뭐가 그리 신났는지 학교에서 낭송했던 동시 ‘감자꽃’을 노래처럼 흥얼거렸다. 이제 막 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강아지풀을 꺾어들고 사슴농장 아래 들판으로 뛰어갔다. 분명히 여름인데 이상하게 서늘하다 못해 춥다. 오들 오들 떨며 핏방울처럼 빨간 산딸기를 따서 한 손에 소중히 모았다. 더 담을 수 없을까 두리번거리다 보니 나는 어느새 방안에 있었다. 방문을 열고 밖을 보니 노을이 사라지며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마당을 지나 소나무가 있는 정원으로 올라가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옹기종기 모여있던 집들이 보이지 않고 허허벌판이다. 아무도 없고 나 혼자다. 분명히 사슴농장 우리 집인데 혼자 우두커니 서서 떨고 있었다.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내가 진짜 울었는지, 아니면 이상한 소리라도 냈던 건지 강아지 두 녀석이 내 얼굴을 정성스럽게 핥는다. 다행히 모두 꿈이었다. 나는 마흔 살이 되어 갈 때까지 사슴농장 꿈을 자주 꾸었다. 농장 안에서 즐겁게 뛰어다니며 과일을 따고 돌을 모으는 꿈을 꾸면 기분이 좋았지만, 어두컴컴한 사슴농장 안에서 혼자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꿈을 꾸고 나면 가슴 한쪽이 차가운 고드름으로 찔린 듯 서늘하게 아팠다. 꿈은 밝고 즐겁거나, 버티기 힘들 만큼 슬프고 외로운 느낌으로 극과 극이었다. 나는 꿈속에서 항상 열 살쯤 돼 보이는 모습이었는데 왜 계속 열 살의 내가 보이는지 궁금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인생에 좋은 경력이 될 거라고 했던 아동복지교사 업무는 정말 나에게 큰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이 경력을 통해 여성가족부에서 주관하고 시청에서 관리하는 복지 업무에 취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맡게 된 주 업무는 지역 여성들을 대상으로 취업상담과 직업교육, 창업상담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계약직이었지만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나는 입사 당시 서른아홉 살 이란 나이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을 할수록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나이 서른아홉 살은 상담을 받으며 고민을 털어놓는 내담자들에게 동생처럼 살갑게, 때론 언니처럼 든든하게 조언해 줄 수 있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최고의 나이였다. 한동안 업무에 풍덩 빠져 퇴근 후,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온통 머릿속엔 일 생각으로 가득했다. 처음 나와 만날 때 소심하고 힘없이 상담하던 내담자들이 취업을 하거나 밝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다시 방문할 때면 내 안에 엔도르핀이 가득 찼다. 그냥 ‘기쁘다’가 아닌, 너무 좋아서 기쁜 감정이 탄산수처럼 ‘톡톡’ 튀며 온몸으로 짜릿하게 퍼져나갔다. 나는 일에 취해 바쁘게 지나가는 시간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바쁘게 지내던 평범한 날이었다. 출근 후 마무리해야 할 일들을 확인하고 가장 좋아하는 믹스커피를 녹여 컵을 살살 돌리며 커피향을 맡았다. 입으로 마시지 않아도 코를 통해 들어오는 커피향은 이미 마시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커피와 함께 여유롭게 업무 시작을 하려는 순간 핸드폰 문자 알람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오늘 잠깐 뵈러 갈게요. 꼭 시간 내주세요.’ 반가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중국에 성인인 두 자녀를 두고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취업한 50대 조선족 내담자였다. ‘네. 편한 시간에 오세요.’ 답글을 보내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반가운 그녀가 상담실로 들어왔다. 우리는 내담자들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는데 나는 그녀를 보자 너무 반가워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선생님”하고 소리쳤다.

“어머,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내 반가운 물음에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은 놀랄 만큼 수척했고 아파 보였다.

“네. 네.”

불안한 눈빛과 몸짓으로 개미 소리만 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어쩐지 전과는 달라 걱정이 되었다.

“선생님, 혹시 아프시거나 무슨 일 있으세요? 오늘 회사에 출근 안 하신 거예요?”

“네. 회사 그만뒀어요. 한 달 전에. 몸은 아프지 않아요.”

그녀는 특유의 중국 발음이 섞인 발음으로 대답은 잘했지만, 한곳을 보지 못하고 계속 두리번거렸다.

“퇴사하시고 다른 곳 알아보시는 거예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선생님 사실 제가 취업이 문제가 아니에요. 저 취업 못해요.”

“왜요? 혹시 중국으로 가세요?”

“아뇨. 아뇨. 저기, 선생님 잠깐 이쪽으로 가까이 오세요.”

다급하게 자기 쪽으로 오라며 손을 흔드는 그녀에게 몸을 기울이자 그녀는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사실, 저 쫓기고 있어요. 자꾸 이상한 사람들이 따라와요. 집에 들어가서 창문으로 보면 밖에서 항상 두 사람이 저를 지켜보고 있어요. 핸드폰도 도청당하고 있어서 선생님께 문자 보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보낸 거예요. 내가 너무 힘들고 답답하니까.”

순간, 나는 너무 놀랐고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황당하다는 듯 얼어버린 내 모습을 보고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 말 안 믿으실 줄 알았어요. 그래도 내 말 들어줄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어서 왔어요.”

“아니에요.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좀 놀라서 그랬어요. 언제부터 사람들이 따라왔어요?”

“한 3개월 전쯤인가 남편이 암에 걸려서 치료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어요. 병원에서. 그때쯤 이상한 사람들이 나를 따라오고, 지켜봤어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얼굴을 보니 겁에 잔뜩 질려 하얗게 변해있었다. 나는 그녀를 안정시키기 위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천천히 말씀하세요. 제가 다 들어드릴게요.”

“남편이 암이래요. 갑자기 암이라고 하면서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우리가 돈이 어디 있어요. 의사 선생님이 우리 같은 사람들 수술비 지원해 주는 곳이 있다고 소개해 주셨는데, 우리는 안된대요. 자격이 없대요.”

“그럼, 남편은 병원에 계세요?”

“아뇨. 회사 기숙사에 있어요. 그런데 회사에서도 이제 나가라고 해요. 아파서 일 못한다고.”

그녀가 사람들에게 미행과 도청을 당한다고 생각한 시기는 남편이 암 선고를 받고도 치료하지 못해 기숙사로 돌아간 날과 맞물려 있었다. 정신적인 충격이 컸던 탓일까? 그녀는 누군가 자기를 따라다니며 해치려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던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선생님, 저 매일 꿈을 꿔요. 중국에서 아이들과 맛있게 저녁 먹던 모습이요. 저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때가 너무 그리워서 꿈꾸나 봐요.”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던 그녀는 “선생님도 괜히 저 때문에 도청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나는 그녀가 돌아간 뒤, 머리가 멍해져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치료비가 없어 아픈 남편을 기숙사에 보내야 했던 그녀는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을까. ‘그때가 너무 그리워서 꿈꾸나 봐요’라는 말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항상 열 살의 모습으로 같은 꿈을 꾸는 것도 그리움 때문 일지 모른다. 기쁨과 슬픔을 알아갔던 너무 철이 들지도 그렇다고 철이 없지도 않은 나이 열 살. 나는 오랜 시간 그때를 그리워하며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와 상담 후 나는 시청 사회복지과로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다. 담당 팀장님은 흔쾌히 그녀를 만나보겠다면서 상담 결과에 따라 적절한 후속 조치도 하겠다고 약속했다. 2주쯤 지났을까. 반가운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우울증으로 인한 망상증이란 진단을 받고 정신과 상담과 함께 약물 치료를 하고 있고, 여러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으로 남편의 암 수술 치료비도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내가 그리워하는 열 살로 돌아갈 수 없지만, 그녀는 그토록 꿈꾸며 그리워하던 행복한 저녁식사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


결혼 후 한 번도 꺼내 보지 않고 숨겨 놓았던 빛바랜 앨범을 넘겨 보니 정말 희한하게 열 살 때 모습이 가장 밝고 즐거워 보였다. 나도 모르게 내 무의식은 언제나 그때를 하염없이 그리워했었나 보다. 앨범을 꺼내 사진을 보며 실컷 웃고 떠들고 난 그날 이후 나는 막연한 그리움을 멈추기로 했다. 이제 ‘열 살의 나’는 그리움보다 지나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고, 언젠가 그리워하며 추억할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내고 싶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사슴농장 꿈을 꾸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것을 잊은 것도, 바뀐 것도 아니다. 마흔다섯 지금의 내가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10살의 나를 품고 조금 더 자랐을 뿐이다.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들판에서 풀을 베어 나르던 ‘경운기 아빠의 딸’이고, 모두가 부러워하던 ‘사슴농장 집 둘째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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