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20분 늦으면 안 돼!

가슴 몽글몽글한 추억

by 노랑꽃

“부지런한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내가 살고 있는 내 동네는 내가 깨끗이 청소합니다!”

일요일 아침, 언니와 나는 늦잠도 자지 못하고 이 두 슬로건이 적힌 깃발을 둘둘 말아 동네 공터로 뛰어내려 가곤 했다. 80년대에 초등학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잘 살아보자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휴일 이른 아침에 청소를 나가야 했다. 부지런하고 깨끗하게 살아보자는 취지는 좋았지만, 어린 초등학생에겐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가끔 고학년 언니, 오빠들이 핑계를 대며 나오지 않는 날에는 청소의 할당량이 늘어나서 한 시간을 넘게 고생을 하기도 했다. 나오지 않거나 늦으면 벌금을 내야 했는데 벌금을 내기는 냈는지, 모아 놓은 벌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행방은 알 수 없었다. 동네 청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허겁지겁 아침밥을 먹고 9시 조금 넘어 시작하는 만화를 보는데, 안 나온 사람의 몫까지 청소하고 오는 날에는 만화를 보지 못한 속상함에 하루 종일 저기압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꼭 늦는 사람이 계속 늦고, 안 나오는 사람이 또 안 나온다. 습관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평일 아침 학교에 갈 때는 아빠가 경운기로 우리들을 등교시켜주셨다.

걸어가면 30분이 넘는 학교 가는 길이 우리 경운기로는 10분 정도면 충분했다. 덕분에 조금이라도 늦잠도 잘 수 있고 편하게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어린아이들까지 우리 경운기를 타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일요일 아침 청소에 안 나오거나 늦는 언니 오빠들도 우리 경운기를 좋아했다. 나는 이점을 이용해 소심한 복수를 계획했다. 그들이 청소에 나오지 않는 건 화가 나도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 경운기는 내 마음대로 태워주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내가 속상했던 만큼 돌려주고 싶었다.


학교 등교 시간 8시 30분이면 동네 길가에 우리 경운기를 타고 가려는 아이들의 줄이 늘어져 있었는데 모든 아이가 다 탈 수는 없기에 일찍 와서 기다리는 순서대로 탈 수 있었다. 나는 복수심에 눈이 멀어 경운기 탑승시간을 10분 앞당겨 8시 20분으로 정했다. 그러면, 그 언니와 오빠들은 타기 힘들어지고 난 복수에 성공하는 것이다. 동네 공터에서 놀다가 집으로 들어가는 저녁 나는 아이들에게 이제 아침 8시 20분까지 나오라며 늦으면 기다리지 않는다는 엄포를 놓았다. 다음 날 아침 어느 때보다 부지런하게 등교 준비를 한 나는 아빠를 재촉해 8시 15분에 동네로 내려갔다. 5분 일찍 가서 멋지게 친구들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매일 늦는 그들이 나올지가 궁금해 서둘렀던 것이다. 20분이 되어가자 아이들은 허겁지겁 뛰어와 경운기에 탔고 내 예상대로 느림보 언니, 오빠들은 나오지 않았다. 경운기에 탄 아이들은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기뻐하면서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고, 어느 누구도 시간을 갑자기 앞당긴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권력의 맛이란 바로 이런 거구나.


그날은 평소보다 더 행복하게 수업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저녁밥을 먹기 전 누군가 아빠를 찾아온 후 그 행복은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형님! 계세요?”

“그래, 저녁시간에 자네가 웬일이야?”

“이것 좀 아이들 주려고 왔어요. 과자예요.”

“그냥 오지 뭐 하러 이런 걸 사 와.”
“매일 아이들 경운기 태워서 학교 보내주시고, 감사해요.”

“아니, 그 말하려고 온 거야? 무슨 일 있나?”

“다른 게 아니고 오늘 아침에 우리 순영이가 30분까지 나갔는데, 경운기가 없었다고 해서요.”

“오늘은 우리 애가 20분에 가야 한다고 해서 10분 일찍 갔지.”

“그래요? 그걸 모르고 30분에 나갔다가 경운기가 없어서 애가 뛰어서 학교에 갔는데 늦었나 봐요. 선생님한테 혼도 나고 뛰어가다가 넘어져서 다리도 다치고 집에서 계속 우네요.”

“어쩌나. 내일은 꼭 태워 준다고 울지 말라고 해.”

“네. 감사합니다 형님. 순영이한테 내일부터 20분까지 나가라고 하겠습니다.”


순영이 언니는 바보다. 다른 애들은 바뀐 시간을 다 알았는데 왜 자기만 몰라? 복수심에 불타 경운기라는 권력을 휘둘렀는데 결과는 찜찜했다. 나는 저녁을 먹으면서 그 맛있는 두부 부침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고, 위장이 꼬인 듯 명치가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이런 걸 원했던 건 아닌데 이렇게 돼버렸다.

차라리 순영 언니가 왜 자기에게 말해주지 않았냐고 원망했으면 더 편했을 텐데, 하루 종일 울고 있고 다치기까지 했다니, 내가 순영 언니를 밀어 넘어뜨린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난 평소에 순하고 착하다고 칭찬받던 어린이인데, 한순간에 악마가 돼버린 것 같아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날 밤 나는 다시는 경운기로 장난치지 말자 다짐했다. 모두가 사랑하고 아껴주는 경운기를 악마의 도구처럼 사용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밤새 반성을 하고 다음 날 친구들을 보니 괜히 더 반갑고 미안한 마음에 조금 늦어도 기다려 줄 수 있다는 말을 슬쩍했다. 순영이 언니는 전날의 슬픔을 다 잊었는지 다친 다리를 걱정하는 동생들에게 딱지가 앉으면 금방 낫는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나에게는 그 얼굴이 꼭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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