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것이 아니어도 괜찮아
이보다 더 힘이 되는 말은 없다
캄캄한 밤을 지나고 맞이하는 사슴농장의 아침은 맑은 이슬과 새소리가 상쾌함을 더해준다.
학교에 가려고 졸린 눈을 비비며 겨우 일어나던 평일과는 달리 주말 아침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나게 된다. 이른 아침 문을 열고 나가면 밤새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코끝을 찌르는 풀냄새와 시큼하면서도 쿰쿰한 흙냄새가 반겨준다. 가끔은 어린 마음에 내가 왜 이런 시골에서 태어나 살고 있을까? 서울에서 살면 얼마나 멋있을까? 생각도 했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 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누가 봐도 아름답고 멋진 곳이니까.
대문을 열면 오십 미터 정도 걸어 올라오는 길과 그 길 양쪽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큰 나무들과 과일나무들이 있고,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수정 원석들이 일렬로 진열되어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서면 정원이 두 개로 나뉘어 있고 정원 안에 세계 각국의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어서 봄과 여름엔 꽃향기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오백 살도 더 넘었다는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고 그 소나무를 지나가면 삼천 평의 사슴농장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사슴 농장 가까운 곳에 원두막이 있었는데, 그 시절에는 파격적인 소재인 쇠 파이프로 만든 원두막이었다. 동네 아이들은 우리 원두막에 올라가 잡기 놀이 한번 하는 게 소원일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아빠는 사슴 외에도 멧돼지, 염소, 닭, 토끼 등의 동물도 키웠다. 사슴농장 반대쪽에는 밭이 있었고 남는 땅은 산딸기나무와 돼지감자가 자라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겨져 있었다.
이렇게 누가 봐도 부럽고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곳. 그곳에 내가 살고 있었다.
물론 우리 것이 아니었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8살 때쯤이었다. 아주 어릴 때는 기억이 없어서 몰랐지만 조금씩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서울 할머니’라고 부르는 분이 계셨는데, 한 달에 한 번 정도 방문해서 농장 장부를 확인하고, 아빠는 그분 앞에서 공손한 자세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셨다.
서울 할머니가 이 아름다운 곳의 주인이었고 아빠는 그분의 농장을 관리하는 관리원이셨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슬프지도 않았고 화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 부모님이 안쓰러웠을 뿐이다. 농장일에, 밭일에 해가 질 때까지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인데 한 번도 힘들다고 내색하신 적이 없었다.
엄마는 힘든 일에 손가락 마디마디가 굵어졌고 햇빛에 탄 얼굴에는 해마다 기미가 늘어 갔다.
어쩌면 나는 힘들게 일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내가 속상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긍정적으로 구김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건 서울 할머니의 도움도 있었다.
우리 가족이 농장에 사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우리 것이라고 하셨고, 정산을 하기 위해 오실 때마다 평소에 먹어보기 힘든 화려한 빵과 과일, 과자를 사다 주셨다. 난 이렇게 멋진 어른들의 사랑과 배려로 상처 받지 않고 자랄 수 있었고 우리 것이 아니어도 아름다운 곳에서 살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가끔은 힘들고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다.
여름 때쯤이면 사슴뿔을 사기 위해 서울에서 매주 사람들이 방문했는데,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왔던 여자아이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아이는 마치 나를 괴롭히기로 작정하고 온 것 같이 내가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와서 곱지 않은 눈으로 훑어보며 험악한 말들을 쏟아 내었다.
“너 몇 살이야? 여기 너희 집 아니라던데?”
“응, 우리 아빠가 관리하셔.”
“야!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너희 거지라고 했어!”
“돈 받고, 관리하는데 왜 거지야?”
“너희 집도 아니고, 농장도 다른 사람 거잖아 그러니까 거지야. 집 없는 거지!”
그 순간 눈물이 쏟아질 듯 화가 났지만 엄마 아빠 얼굴부터 언니와 동생의 얼굴까지 짧은 순간에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이 스치면서 울면 지는 거라고 생각을 했다.
“ 너는 나쁜 말 하는 거 보니 마음이 병들었구나. 고치기 힘들겠다. 병원에 가봐.”
나의 이 한마디에 여자아이는 뭐가 억울한지 도끼눈을 뜬 채 부들부들 떨면서 뒤돌아 갔다.
여자아이는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고 이런 행동을 했을까? 지금 말하는 소위 갑질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어린아이의 입에서 그런 험한 말들이 거침없이 나왔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그림일기장에 속상한 마음을 쏟아 내기도 했다. 가슴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그림을 그리고 ‘오늘은 슬픈 날’ 이란 제목으로 일기를 썼다. 언니에게만 그 일에 대해 살짝 이야기했는데 언니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괜찮다면서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역시 우리 언니였다. 만약 언니가 속상해했다면 내가 더 슬프고 아팠을 텐데 언니의 흐트러짐 없는 표정이 오히려 위로가 됐다. 사실, 이 좋은 환경을 누리고 사는 건 우리 가족이었다. 맑은 공기와 멋진 나무들, 여러 과일나무와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끝나지 않는 넓은 땅. 우리 것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약 내 주위에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면 어땠을까? 항상 해맑고 다 괜찮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어린아이의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게 노력해 주는 어른들이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다. 가지고 있는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나누고 따지는 사람보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많았다. 시간이 지나 지금을 살고 있는 나는 욕심이 많아지고 가지지 못한 것에 집착하면서 불안해하고 있다. 지난 시절의 나처럼 다시 용감해지고 싶은데 자신이 없다. 왜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살고 있는 건지. 어렵지만 용기를 내서 내 마음속에 해맑던 어린 내가 다시 살아나길 바라면서 말해본다. “우리 것이 아니어도 괜찮아.”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에게 이보다 더 힘이 되는 따뜻한 말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