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할아버지가 되는 마법

풀릴 수 없는 마법

by 노랑꽃

독일의 형제작가인 그림 형제는 '개구리 왕자'라는 동화를 집필했다. 독일의 민담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그림형제가 재구성해서 발표한 글이라고 한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엄마는 세계문학전집, 동화전집, 백과사전 등의 책들을 사주셨는데, 나는 그 많은 책 중에 ‘개구리 왕자’를 제일 좋아했다. 주위 또래 여자아이들은 보통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등 여주인공이 행복해지는 동화를 좋아하고 공주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물론 나도 공주가 나오는 책도 좋아했지만, 개구리 왕자는 나에게 좋아하는 책 이상의 책이었다. 책의 겉표지가 닳고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던 소중한 나의 희망. 우리 아빠에게 걸린 마법도 개구리 왕자처럼 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10살이 될 때까지 아빠가 할아버지가 돼버린 마법에 걸렸다고 믿었다.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는 날에는 사슴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는 했는데, 농장 안에서 일하시는 아빠를 볼 때마다 친구들은 한결같이 “너희 아빠 늙었다.”는 말을 했다. 나도 모르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매일 보는 친구들의 입에서 “늙었다”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친구들의 말을 듣고 기분이 울적한 날이면 나는 가만히 아빠의 얼굴을 관찰했다. 새까만 피부에 살짝 넓은 이마, 그 이마를 지렁이처럼 구불구불 덮고 있는 주름들, 튀어나온 광대뼈와 푹 꺼진 볼살. 내가 9살이 되던 해 아빠의 나이는 이미 오십을 넘었다. 삼십 대인 다른 아빠들을 보다가 우리 아빠를 보면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나는 나이 든 아빠의 얼굴을 보며 개구리 왕자에 나오는 왕자처럼 아빠의 마법도 꼭 풀리기를 기도했다. 아빠의 나이가 지금보다 10살만 어려지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도 했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라는 걸 알게 된 후, 나는 되도록이면 내 친구들이 우리 아빠를 만나는 기회가 없기를 기도했다.


나이 많은 아빠가 창피하다고 느낄 무렵, 아빠가 학교 소풍장소에 경운기를 타고 오신 일이 있었다. 소풍장소가 산이었는데, 그 주위에 풀을 베러 오셨다가 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오신 듯했다. 나는 경운기 소리만 들어도 아빠라는 걸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나를 찾기 위해 경운기를 멈추고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묻는 듯한 아빠의 모습을 봤을 때 나는 화들짝 놀라 산 위로 도망쳤다. 산 위쪽에는 보물찾기 게임이 끝난 것을 아쉬워하는 몇몇의 아이들이 혹시라도 남아 있을 선물 쪽지를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었다. 나도 쪽지를 찾으러 온 것처럼 친구들과 섞여 이리저리 다니면서도 신경은 온통 산 아래 아빠에게 가있었다. 한참 후에 슬쩍 내려와 아빠가 없다는 걸 확인 후 안심하고 있는데 한 남자아이가 반갑게 달려와 나에게 말해 주었다.

“야, 아까 너희 할아버지가 너 찾아다녔어.”

벗어날 수 없는 할아버지의 마법에 짜증이 나면서도 아빠에게 몹쓸 짓을 한 죄책감으로 그날 소풍은 마무리되었다. 집으로 올 때부터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누웠는데, 그날 밤 열이 40도를 넘나들며 홍역을 앓았다. 밤새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아프고 힘들면서 흐르던 눈물은, 아파서 흘리는 눈물만은 아니었다. 아빠를 외면한 한심한 나에 대한 후회였고, 뉘우침이었다. 내가 일부러 아빠를 외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빠는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생각만 해도 내 가슴이 먹먹했다.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가시지 않는다. 자식들 쉽게 키우는 부모 없겠지만, 나이가 많던 내 부모님은 얼마나 더 힘드셨을까. 두 분 모두 작은 체구에 힘들어도 억척같이 일하면서 자식들 잘 키워보겠다고 애썼을 그 세월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어릴 적 동생과 사탕을 사려고 동네 구멍가게에 들어갔을 때 소주를 마시고 있던 아빠와 친구인 이장 아저씨는 우리를 보고 “어휴, 영근이는 어떻게 하냐.” 걱정스럽게 말을 했었다. 그때는 어려서 그 말속에 숨어있는 무거움과 걱정을 몰랐다. 본인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취업하려는 딸이 있는데, 우리 아빠는 사탕 사 먹으러 다니는 어린 자식들이 있으니 남이지만 한숨이 나왔을 것이다.

삶의 무거움을 묵묵하게 지내오신 부모님의 머리카락은 이제 흰색으로 물들었다. 가끔 엄마는 “너희들 키울 때 언제 다 키우나 한숨만 나왔는데, 진짜 다 컸다.”라고 말씀하신다. 세명 키우기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지금은 다 키워 놓고 보니 허전하다는 말씀도 하신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 죽을 만큼 힘들게 키웠던 기억보다 노년의 외로움이 더 큰 것 같다. 여든이 넘으신 아빠는 지금도 경제 활동을 하신다. 일주일에 삼일 정도 주유소에서 사원으로 일하고 계시는데, 일은 힘들지 않을지 걱정과 궁금증에 남편과 슬쩍 가보기도 했다. 주유소 유니폼을 입으시고 주유 손님이 올 때마다 물이나, 휴지를 가져다주시며 열심히 일 하고 계시던 아빠의 모습. 자랑스럽지만 걱정도 된다. 일을 하지 않으면 답답하다고 하시지만 한평생 일을 쉬지 못하시는 것 같아 가슴이 아리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시간의 마법에 걸려 늙어 가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삶을 사셨던 부모님을 생각하면 흘러가는 시간이 아쉽다. 아쉬운 만큼 앞으로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할 수만 있다면 부모님의 시간이 흐르지 않고 이대로 5년만 잠시 머무르게 하고 싶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개구리 왕자처럼 마법이 풀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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