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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꽃 Jun 21. 2023

눈물로 지나온 길을 웃으며 돌아간다

햇빛아래 뜨겁게 달궈진 군훈련소 연병장에서 아들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


"먼 길을 온 아들들 쉬게 해야 하니 아쉽더라도 부모님들께서는 지금 즉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맞는 말인데 야속하게만 들리는 안내방송이다. 나는 입대 전 미리 약속한 대로 절대 울지 않았다. '안녕'이라는 말을 쿨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약속은 지켰다. 아들의 얼굴을 한 번 더 어루만져보고 어느새 듬직해진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훈련 잘 받아. 다치지 말고 알았지?"

"알았어요. 얼른 가세요. 아빠 운전하시다가 꼭 휴게소에서 쉬면서 가시고요."


강원도에서 충남까지 운전해야 하는 아빠를 걱정하는 아들을 뒤로하고 보란 듯 씩씩하게 웃으며 걸어오는 길. 남편도 나도 말이 없다. 차 시동을 걸고 집으로 돌아가는 부모들의 긴 차량행렬 속에서 차량통제 깃발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도로를 통제하던 군인이 삑삑 호루라기를 불며 우리 쪽 차량을 향해 이제 지나가도 된다고 깃발을 흔드며 경례를 한다. 순간 나도 경례를 해야 하는 건가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가 인사를 놓쳤다. 고개라도 살짝 숙이며 인사했어야 했는데 수고하는 청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훈련소를 빠져나와 강원도의 시골 도로를 달렸다. 마을의 사거리를 지나고 글램핑장이 늘어선 도로도 지나, 여러 군부대 앞을 지나갔지만 남편과 나는 서로 말이 없다. 이 순간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오후 3시가 넘어가는 시간. 강원도 철원의 날씨는 너무 화창하고 아름답다. 오후 햇살은 내 마음도 모르고 반짜반짝 그저 예쁘기만 하다. 신호대기 중 전방에 보이는 아름드리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이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남편이 볼까 봐 조용히 휴지로 눈을 꾹꾹 눌렀다. 


"거...참... 날씨 드럽게 좋네!"


괜히 거친 말로 눈물을 숨겨본다. 남편은 슬쩍 내쪽을 보고는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야'라는 듯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강원도 길을 눈물로 지나가다니... 


아들을 보내고 며칠 후 사람들이 말하는 '눈물 박스'가 도착했다. 훈련소에 입소할 때 입었던 옷과 소지품 신발이 들어있는 커다란 박스가 현관 앞에 놓여있었다. 순간 코 끝이 찡하고 시큰해진다. 박스를 열고 아들의 체취가 남은 옷을 꺼내어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까만 가방을 꺼낸 순간, 가방 앞 그물주머니에 곱게 접힌 하얀색 쪽지를 발견했다. 아들이 남긴 편지였다. 이래서 사람들이 눈물 박스라고 하는구나... 조심스레 접힌 종이를 펴보았다.


사랑하는 부모님께

안녕하세요 엄마, 아빠! 아들입니다 ㅎㅎ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날짜가 5월 6일 오후 5시.


으응? 

이것은 마치 비밀접선 쪽지 같은 그런 느낌?

참으로 간결하다. 순간 눈물 박스가 웃음 박스가 되었다. 나는 적어도 부모님 저는 잘 있고, 밥도 잘 먹고, 안 다치고 훈련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아라, 부모님도 잘 지내세요 정도의 내용을 예상했는데 예상치 못한 내용에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눈물 보단 웃음이 좋은 것 같다.


만 5주의 훈련기간이 끝나고 자대로 가기 전 수료식을 하는 아들을 만나러 다시 강원도 길을 달려간다. 수료식 후 7시간 정도 외출을 하는 아들과 함께 하기 위해 펜션도 예약하고 차 뒷좌석에 고기, 음료수, 과자, 밥, 라면, 각종 야채 과일을 싣고 가는 길. 새벽 4시에 출발을 해도 피곤하지 않고 행복하다. 5주 전 눈물을 흘리며 왔던 길인데 그 길을 웃으며 가고 있다. 분명히 같은 길인데 이렇게 느낌이 틀리다니 참 신기하다. 


훈련기간 동안 각이 잡힌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장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한, 아들의 가슴과 팔에 이등병 계급과 국기를 붙여주니 실감이 난다. 이제 정말 아들이 군인이구나... 부모와 함께 할 수 있는 7시간 동안 오랜만에 웃고 떠들고 먹으면서 아들의 목에 걸려있는 군번줄이 자꾸 눈에 띄었다. 군번줄은 이제 이 아이는 2024년 11월 1일까지 너의 아들이 아닌 국가의 아들이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 순간, 누구의 아들이건 아프거나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군생활을 잘 마치기만을 바랄 뿐이다.


자대 배치를 받고 통신병이란 임무를 부여받아 새롭게 시작하는 아들. 그 아들을 보기 위해서 오랜 시간 달려와야 하는 강원도의 시골길. 이 길은 이제 그리움을 싣고 웃으며 달려갈 수 있는 길이 되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부모들의 눈물과 웃음이 지나갔던 이 길이 이제는 슬프지만은 않아서 다행이다. 다시 아들을 만나러 갈 수 있는 날, 그날엔 마음껏 웃으며 지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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