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하나님은 자비가 없는 분이었다.
오랜 시간 컴퓨터 정리를 미루고 있었다. 그동안 핸드폰으로 찍어서 옮겨 놓았던 사진과 동영상들, 잘 사용하지 않으면서 깔아놓았던 여러 프로그램들이 가뜩이나 노후되어 신나게 달리지 못하는 컴퓨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었다.
마음먹고 컴퓨터의 모든 폴더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순간 '그날'이라는 폴더에서 지금 보다 훨씬 젊었던 나와 그녀가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띄었다.
2007년 2월, 그러니까 16년 전 내가 살고 있는 이곳으로 이사오던 해에 그녀를 처음 만났다. 인천에서 충남으로 이사 오게 된 우리 부부는 이사 온 첫 주부터 집 주변 교회를 다니며 내 교회 찾기에 열심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가까운 교회는 마음에 들지 않았고 차로 20분은 가야 하는 조금 먼 교회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그곳, 우리 교회가 된 그곳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어머, 우리 구역이시네. 앞으로 구역예배 때 만나겠네요."
살갑게 다가오던 그녀는 50대 여성으로 푸근한 몸매에 제법 비싸 보이는 세련된 옷으로 멋을 부린 멋쟁이였다. 그 당시 내가 살던 아파트 맞은편 개인주택에 살았던 그녀는 매주 금요일 오전 11시에 구역 예배를 인도하는 구역장이었다. 구역원들은 모두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아이 엄마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구역장인 그녀의 말이라면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르는 순둥이들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면서 조금은 강압적이면서 고집스러운 그녀의 성격이 불편해졌지만 30대 초반인 내가 50대인 그녀에게 감히 불만을 이야기할 수 없어 포기하고 있었을 때쯤이었을 것이다.
남편과 함께 교회로 들어가 봉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갑작스러운 복통에 하혈까지 한 나는 급하게 남편을 찾았다. 피가 나는 것 같다는 내 말에 놀란 남편은 하얗게 질린 나를 차에 태워 산부인과로 향했고, 검진결과 자궁 외 임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사는 일단 하혈은 하지만 주사요법으로 나팔관에 잘못 착상된 태아를 줄여서 소멸시키는 방법을 써보자는 이야기를 했다. 어떤 주사인지 잊어버렸지만, 주사를 맞은 그날 온몸이 아팠다는 것은 아직 잊지 못한다. 주사를 맞고 온 그날 새벽 태어나서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느꼈다. 두 아이를 출산했어도 그런 고통은 너무 낯설고 무서운 고통이었다.
119에 연락을 하고 하혈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먼저 병원으로 보낸 남편은 6살, 5살 두 아이를 깨워 옷을 입히고 병원으로 따라왔다. 주사요법이 무색하게 나팔관에 착상한 태아가 터지면서 출혈을 일으켜 내부출혈로 이어졌던 것이다. 응급 수술이 잡히고 그렇게 나는 절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의사는 잘 알고 있었다.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를. (퇴원하기 전 담당의사는 병원 맨 위층 피부관리실에 연락을 해서 너무 고생한 환자분이 있는데 피부관리 2회 부탁한다면서 나를 올려 보내기도 했다)
생전 태어나 처음 본 사람도 자신이 겪은 일이 아니어도 타인의 아픔을 예상하고 공감하며 배려를 하는데, 같은 구역의 구역장이었던 그녀는... 1년이란 시간 동안 매주 3번 이상은 만났던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수술을 마치고 아기를 낳은 것과 동일하게 자궁이 부풀어 올라 수술 부위에 모래주머니 얹고 진통제로 버티던 날이었다. 병원 측에서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면서 '절대안정, 면회불가' 팻말을 문 앞에 걸어주었고 남편 외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했다.
"앞으로 이삼일 정도는 푹 쉴 수 있게 해 드릴게요."
얼굴만큼 예쁜 간호사의 상냥한 배려가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진통제 때문일까 약간은 비몽사몽 한 상태였는데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떠서 시간을 확이 나니 오후 4시쯤이었다. 11시에 수술이 끝났으니 5시간 정도가 지난 시간이었다.
무슨 일이지 싶어 아픈 몸을 뒤척이며 일으키려는 순간 벌컥 병실의 문이 열리고 다소 흥분한 그녀와 2명의 구역원 그리고 수간호사가 들어왔다.
"아니, 안된다는데 왜 그러세요. 기다려 보세요!"
얼굴이 벌게진 채 외치던 수간호사가 나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죄송해요. 면회 안된다고 했는데..."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 구역장인 그녀가 피식 웃으면서 한 마디를 던졌다.
"아니, 안되긴 뭘 안 돼요. 잠깐 얼굴 보는 건데."
막무가내를 넘어 무식한 행동을 한 그녀에게 화도 나고 수간호사 얼굴 보기도 민망했던 나는
"괜찮아요. 감사해요."라는 말로 간호사를 다독였다.
하혈을 한 날, 교회에서 급하게 병원으로 간 사실을 알던 그녀는 내 소식이 궁금해 나의 남편에게 연락을 해서 내가 수술받았다는 이야기와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하니 면회 불가라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기에 그냥 있을 수 없어 구역원 2명과 함께 병문안을 왔다면서 생색을 냈다.
"아니, 여기가 무슨 서울 종합병원도 아니고, 큰 수술도 아닌데 면회가 안된대? 새로 생긴 병원이라서 그런가 유난이야 유난~"
콧방귀를 뀌며 비꼬듯 이야기하던 그녀의 얼굴과 표정, 수술한 후 피주머니와 소변주머니를 차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나를 보며 별거 아닌 수술이라며 그리 덥지도 않던 5월에 손부채질 하던 모습이 솔직히 역겨울 정도였다. 간호사는 걱정이 되었는지 2번 정도 왔다 갔다 하면서 나를 살펴보았다.
충실한 하나님의 종이었던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 결정타를 날렸다.
"자기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아? 제대로 기도 안 하고 교회에서 봉사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하나님이 치시는 거지. 앞으로 똑바로 교회생활해. 그래야 잘 살아."
그녀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
어떤 하나님인지는 몰라도 분명한 건 내가 알고 있는 하늘의 그 분과는 다른 분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적어도 괘씸죄로 사랑하는 자녀의 육체를 치는 분은 아니었다. 친다는 말 자체가 거북하게 들리고 속이 뒤틀렸다.
퇴근해서 병원으로 온 남편은 병실로 들어오기 전 간호사에게 그녀의 방문에 대해 들었고 간호사는 본인의 잘못이 없음에도 다음날까지 '죄송해서 어째요.'라며 미안해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기분 나쁘게 했던 그녀는 제일 평안했다. 본인이 한 행동과 말들이 상대방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전혀 몰랐고 항상 사람 좋은 표정으로 밝게 인사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다 알고 있는 듯 무례했던 그녀.
자신만의 생각으로 믿음과 기도, 봉사를 강요했던 그녀의 사진 속 얼굴이 참 젊어 보였다. 그녀의 무례함에 화가 나 그동안 살갑게 지내지는 못했어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사십 대 중반이 넘어가는 나이가 마음속 벌어진 상처를 감쌀 정도로 여유로운 나이이구나 싶다.
그날 이후 그녀 덕분에 말조심하자는 생각을 하고 또 했으니 얻은 것도 있고 이제는 60대의 지긋한 나이가 된 그녀의 생각 또한 깊어졌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어젠가 그녀와 함께 좋은 추억만을 꺼내놓고 차 한잔 마시고 싶다. 그때처럼 슬쩍 웃으며 악담을 퍼붓지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