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방송되었던 'TV 동물농장' 재방송을 하고 있다. 엄청 똑똑한 리트리버 이야기인데, 얼마나 똑똑한지 견주가 요구하는 물건의 단어만 듣고도 정확도 100%로 물건을 찾아온다. 보고 있던 내 입에서 "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감탄하고 있는 내 옆에는 꿈을 꾸는지 앞다리를 살짝살짝 움직이며 자고 있는 우리 집 강아지 토리와 보리가 있다.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는 내 눈빛을 느낀 녀석들이 실눈을 뜨고 나를 슬쩍 바라보더니 스르르 배를 뒤집는다. 어서 만지라는 뜻이다. 스륵~ 스륵~ 손으로 정성스럽게 녀석들의 배를 만져주니 다시 잠이 든다.
우리 집 강아지들은 본인들에게 필요한 단어만 기억하는 것 같다. 가령 딸아이와 대화하다가 '간식'이란 단어만 나오면 저 멀리에서 어느새 코앞까지 앉아있다. 대충 생각해 보니 토리 보리가 찰떡같이 알아듣는 단어는 간식, 까까, 맘마, 사료, 밥, 아빠, 엄마, 언니, 오빠, 산책, 저리 가, 안돼, 가자, 앉아, 일어서, 이리 와, 아니냐, 옳지, 목욕하자, 아구 이뻐라, 뽀뽀, 사랑해, 귀요미 등의 단어가 전부이다.
"너희들도 공부할래? 단어 공부! 우리 똑똑해질까?"
갑자기 벌떡 일어난 토리는 기지개를 켜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듣기 싫은가 보다.
내 옆에 남아있는 보리는 동그란 눈으로 애교스럽게 앞발로 나를 툭툭 건드린다. 이상한 소리는 됐고, 쉬지 말고 자기를 만져주고 예뻐하라는 요구이다.
"그래~ 공부는 무슨 공부냐.. 건강만 해라.."
내 손길에 잠든 보리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다시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태어난 지 2개월 3일 된 녀석들을 데리고 온 후 2주 뒤, 딸아이와 나는 강아지들 목욕을 준비했다. 먼저 말괄량이 보리를 욕실에서 씻겨 내보냈고 아들과 딸은 보리의 털을 말려주었다. 한참 토리를 씻기고 마무리할 때쯤 딸아이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아악! 엄마! 엄마!"
거실로 나와 보니 딸아이는 울고 있었고 아들은 놀라서 온 몸이 굳어있었다.
"왜? 무슨 일인데?"
아이들에게 묻자마자 내 눈에는 온몸이 하얀 이물질로 뒤덮여 굳어 버린 보리가 있었다.
"털 말리고 놔줬는데... 갑자기 뛰어가다가 여기에 빠졌어..."
보리는 남편의 손가락 재활치료를 위해 구입한 파라핀 기계에 빠졌던 것이다. 그 뜨거운 촛물에 그 작은 몸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빠져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눈썹이 뒤엉켜 붙어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눈은 금방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사람 손에 담그면 잘 벗겨지던 촛농은 보리의 털에 굳어버려 꿈쩍하지 않았다. 기계의 뚜껑이 너무 얕아서 펄쩍 뛰던 보리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저 멀리 나가떨어져 있었다. 온 바닥에 촛농이 튀어 난장판이 되었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보리는... 우리 보리는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끙끙 앓는 보리를 담요로 덮어서 안고 무조건 뛰어나갔다. 아들은 집에 남아 토리를 보고 나와 딸은 병원을 가려고 했지만 시간은 밤 8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덜덜 떨면서 침착하려고 애쓰던 그때 기적처럼 택시 한 대가 지나가다가 우리를 보고 멈췄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일단 타세요!"
"아저씨 강아지가 다쳤는데.. 혹시 다니시다가 밤 시간에 문연 동물병원 보신 적 있으세요?"
"아.. 글쎄요.. 거기가 9시까지 했던 거 같은데.. 시내 쪽에.. 오늘 목요일이죠? 그럼 거기 9시까지 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병원으로 가주세요."
"강아지가 많이 다쳤어요? 어쩌나.."
정말 하늘에서 보내준 은인 같았던 택시기사님 덕분에 무사히 병원으로 왔지만, 의사 선생님은 정말 당황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저기.. 일단 눈 깜빡일 수 있게 핀셋으로 눈썹 좀 떼어주고, 항문이랑 귓속에 들어간 부분 확인해볼게요. 딱딱하게 굳어서 털을 밀수도 없는 상황이고.. 피부가 데었는지도 확인이 안 되는데.. 파라핀을 녹이려고 뜨거운 열을 가하면 강아지가 또 다칠 거라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아.. 정말 방법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방법이 없다니.... 가슴이 미어져 터질 것 같은데 선생님이 한 번 더 비수를 꽂았다.
"파라핀 제거가 안되면... 공기가 통하지 않아 살이 상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러면 엄청 고통스러워서... 그렇게 되면 안락사를 생각해 보셔야 해요."
집으로 돌아와 앉지도 서지도 못하며 앓는 소리를 내는 보리를 보며 펑펑 울었다. 어떻게 해줘야 할까... 답답한 마음에 가위로 털을 잘라 보려고 했지만 털에 붙은 파라핀은 꿈쩍하지도 않고 조금만 당겨도 피부까지 땅겨져 가위로 자르다가 살까지 베어버릴 기세였다.
야근이었던 남편이 9시 조금 넘어 도착했다. 이미 전화로 상황을 전달했는데 막상 보니 기가 막혔는지 남편은 놀란 표정으로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남편은 회사 상사에게 내일 출근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고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내일 회사 안 가고 할 수 있는데 까지 파라핀 제거해봐야지."
남편의 말에 힘입어 나도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밤 11시가 넘어갈 무렵 남편은 그나마 해볼 수 있는 게 주방세제를 따뜻한 물에 풀고 보리를 담가서 떼어보는 것이라고 했다. (일반 비누로 해봤지만 오히려 파라핀은 더 꾸덕꾸덕 강해졌고 빨래세제는 너무 독해서 안될 것 같았다.)
따뜻한 물을 받아 주방세제를 풀고 그 물에 보리를 담가 세제물을 온몸에 뿌렸다. 파라핀이 약간 부드러워지는 것 같은 느낌은 들었지만 떼어지지는 않았다. 남편과 나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참빗이 생각났다. 참빗을 가져다가 참빗의 한쪽 끝으로 조심스럽게 긁어내면서 떼어내니 조금이라도 떼어졌다. 다만 털을 거의 한 올 한 올씩 잡고 떼야해서 도대체 언제 다 해낼 수 있을지가 막막했다. 살이 썩어 들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나는 내일 연차 냈으니까 내일 내가 하고, 다음날은 당신이 연차 쓸 수 있지?"
남편의 말에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 부부는 3시간 파라핀 제거 작업하고 1시간 쉬고를 무한 반복하며 한 올 한 올 촛농을 떼어내는 작업을 2일을 넘게 했다. 조그만 몸집의 보리도 지칠 대로 지치고 힘들어했지만 파라핀이 제거될 때마다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마지막 날 발등에 남은 파라핀을 빼고 거의 모든 파라핀을 제거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기뻐서 웃었는지 모른다. 뜨거운 파라핀에 각막이나 귓속, 피부가 많이 다치지 않았는지 보기 위해 다시 동물병원을 방문했을 때 선생님은 정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하신 건데... 와.. 대단하시네요.. 혹시 방법을 알고 있는 학교 동문이 있을까 물어봤었는데, 다들 안락사 밖에 방법이 없을 거라고 했거든요."
의사 선생님도 그날의 보리 모습이 너무 처참했는지 동문들에게 방법을 수소문했었던 것 같다.
3일 가까운 시간을 우리 부부가 어떻게 했는지 이야기 듣던 선생님은 주방세제에 오래 노출되어 허벅지 피부가 빨갛게 된 것과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힘들어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우리는 그날 기분 좋게 보습크림과 염증약 일주일치를 처방받고 돌아와 오랫동안 단잠에 빠졌다.
혹시 그날의 일로 보리의 털이 잘 자라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풍성한 모발을 자랑하고 시력에도 문제가 없었다.
이 순수하고 작은 영혼의 사랑을 받지 못할 뻔했던 6년 전 그날을 생각하면 단어 공부는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보리는 그저 사랑이다.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사랑을 주었고, 주고 있고, 그래서 후회 없고 뿌듯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준 사랑은 내가 받는 사랑의 반도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있다. 아무 의심 없는 눈빛, 순진한 표정, 절대적인 의지와 믿음, 신뢰... 보리는 이미 나에게 동물, 강아지를 넘어선 사랑이다.
더 똑똑해지는 게 뭐가 중요할까?
그냥 존재만으로도 행복하니 보리, 토리에게 공부는 필요 없다.
"보리야~ 얼굴 크고, 통통해도 괜찮아! 넌 그냥 사랑이야!"
"이거 봐~ 이거 여기에 둔다~ 이렇게.. 봤지? 이제 5초 안에 찾는 거야. 알았지?"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강아지들에게 천재 강아지 테스트를 한다고 한다.
아이고.. 아부지!
안타깝게도 남편은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