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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꽃 Jan 04. 2022

그래도 용기를 선택하겠습니다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

두 달 전, 맞은편 203호 가족이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자주 마주쳤던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고등학생, 중학생 세 자녀들과 평범하게 살아갔던 평범한 가족들이었다. 이틀에 걸쳐 손수 짐을 나르고 이사 준비를 하는 203호 가족을 보며 참 알뜰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가까운 곳으로 가도 직접 짐을 옮긴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아주머니는 마르고 작은 몸으로 씩씩하게 무거운 짐을 용달차에 실었다. 어릴 때 이후로 용달차 이사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이틀 후 203호의 현관문이 활짝 열린 채 장판과 도배를 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어떤 사람들이 이사 올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25평의 20년이 된 아파트는 중문 설치도 할 수 없는 구조였기에 현관문을 열면 거실이 훤히 보였다. 훤히 보이는 그곳에 붙여지는 하얀 벽지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깨끗함이었다.


2022년의 첫 날인 1월 1일 밤 12시 5분쯤, 하얀 벽지가 마냥 깨끗했던 203호는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이 돼버렸다. 새해가 되는 설레는 시간, 아들이 4시간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올 시간이었다. 벌써 2022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면서 남편과 이야기를 하던 중 신경을 거스르는 쿵쾅 소리에 잠시 대화가 멈췄다.


"아니, 이 시간에 뭐지?"

남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쿵쾅, 우두두둑 소리가 섞인 채 사람의 비명 같은 큰 외침이 들렸다.

"아이들이 계단 뛰어다니면서 노는 건가?"

"에이.. 밤 12시가 넘었는데?"


나는 겉옷을 급하게 입고 204호를 지나쳐 계단으로 나가 보기 위해 203호 쪽으로 걸음을 옮긴 순간 내 귀를 의심할만한 소리를 들었다.



"내가 너 죽여버린다! 내가 너 진작 죽일 수 있었는데, 알지?"

"네.. 흐흑..네.."

"내가 오늘 너 진짜 죽인다. 죽여버린다!"


203호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아이들은 피해 다니는지, 다급한 발소리가 나고 남자는 무자비한 말들을 다시 쏟아 내고 있었다.


"내가 지금 너 못 죽이면, 학원 앞으로 가서 죽일거야!"


순간, 나는 집으로 뛰어 들어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놀라서 쳐다보는 남편을 뒤로하고 112에 전화했다.


"여기 충남 00시 00 아파트인데요. 가정폭력인 거 같은데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면서 때리고 있어요! 빨리 와 주세요!"


남편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올 아들을 마중 나가겠다는 나를 말리고 본인이 나가겠다고 했지만, 나는 남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갔다. 아파트 입구에는 203호 아랫집인 103호 할머니가 긴장된 얼굴로 떨고 계셨다.


"할머니 윗집 때문에 나오셨죠?"

"어떻게 알았어? 무서워 죽겠네."

"제가 신고했어요. 걱정 마세요."

"아휴.. 잘했네. 경비 아저씨한테 말할까 하고 나왔었는데..."


그 사이 아들이 아파트 앞으로 들어섰고 나는 아들에게 203호를 지날 때 무슨 소리가 나도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집으로 들어가라고 당부했다. 아들을 올려 보내고 나니 경찰차 2대가 도착했고 총 4명의 경찰이 보였다.


"제가 신고자인데요. 빨리 올라가 보세요."


내 집으로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203호 현관 앞.

경찰들이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잠시 기다리는 동안 203호에서는 "경찰입니다! 문 열어보세요!" 소리에 당황한 듯 정적이 흘렀다. 남자가 마지못해 빼꼼히 문을 여는 걸 보는 순간 나는 휙~ 몸을 숨겼다. 신고는 했지만, 나중에 보복을 당할까 두려웠다.


"문 더 여십시오. 들어가서 확인하겠습니다!"


경찰의 단호한 말에 남자는 못마땅한 듯 문을 열었고 경찰들이 모두 들어간 후 나는 조심스럽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벌벌 떨리는 손과 다리를 꼭꼭 주무르며 제발 경찰들이 금방 돌아가지 않기를 기도했다. 내가 들었던 소리는 일반적인 체벌이나 야단이 아니었다. 살 떨리는 협박에 폭력까지 예상되는 무서운 상황이었다.


현관 외시경을 통해 맞은편 203호의 동태를 살피니 조용했다. 왠지 그 조용함이 더 무서웠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203호 쪽으로 가니 다행히 아직 경찰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203호 남자는 뻔뻔하게 자기변명에 급급한 목소리였다.


"아니, 아파트에서 이웃끼리 좀 시끄러울 수도 있지, 그렇다고 경찰이 옵니까?"

"그냥 시끄러우신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경찰의 물음에 별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양심은 있는 건가?

이후로 20분 이상 경찰이 나오지 않았고 다행히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경찰이 돌아가는 걸 확인 후 그제야 겉옷을 벗고 손을 닦는 나에게 남편과 아들은 더 이상 203호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말을 했다.


"엄마, 만약 203호 남자가 보복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요? 이제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쓰니? 아이들한테 협박하고 폭력을 쓰는데.."

"엄마 목숨도 소중하잖아요. 만약 엄마 다치면 우린 어떻게 하라고요."

"너희 다 컸는데 뭐."

"다 컸다고 엄마가 필요 없는 건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다. 내 목숨도 소중하고 아이들에겐 언제나 엄마는 필요한 존재이다. 하지만 가슴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게 느껴지며 마음이 아팠다.


"너희 말도 맞는데, 그런데 엄마는 그냥 모른척할 수 없다. 만약 저 아이들이 너희들이라면? 너희들이 그 입장이라면 누군가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을까? 누군가 신고라도 해주길 바라지 않겠어?"


아들은 "휴..." 소리를 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지만, 이해한 건 아니었다.


"엄마는 어른이잖아. 그래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오늘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면 엄마는 또 신고할 거야."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른척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웃의 고통을 알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혹시 모를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다. 나도 두려웠다. 두려웠기에 203호 남자에게 당당히 얼굴을 보이며 "내가 신고했다!"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든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지나치지 않고 112를 누를 것이다.


거의 매일 맷돌을 가는지, 돌을 던지고 굴리는지 드르륵.. 퍽.. 소리에 발소리, 욕하는 소리까지 스트레스받고 계신다는 103호 할머니의 말이 맴돈다. 분명히 한 번으로 그칠 폭력이 아니라는 걸 2022년의 첫새벽에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잔다르크처럼 두려움을 이기며 앞으로 나가 소리치며 그 폭력에 맞서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어른으로서, 이웃으로서 모른 척 지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남자는 그동안 자신의 폭력을 알면서도 선뜻 끼어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의기양양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사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나는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예외의 이웃이 될 준비가 되어있다. 이것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 어른으로서 내가 할 일이며 의무라고 생각한다.


작은 용기가 세상을 비추는 작은 빛이 될 수 있다는 조금은 고리타분할 수 있는 이 말을 나는 믿는다. 차가운 세상, 나는 그 용기가 꺼지지 않고 필요한 상황에서 언제나 나올 수 있기를 바라며 조심히 가슴을 토닥여 본다. 이 작은 빛을 절대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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