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히도 잊히지 않는 얼굴
우리 엄마에게 ‘엄마’란 조금은 불편하고, 서운하기도 한 그런 존재인 것 같았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분명 일반적인 모녀 사이에서 느껴지는 느낌과는 다른 것이었다. 특별히 미워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애틋하게 생각하는 느낌도 아니었다.
3남 3녀 중 장녀인 엄마는 항상 형제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컸고, 특히 외삼촌들이 큰 누나인 우리 엄마를 잘 따랐다. 형제들과는 사이가 좋은데, 친정엄마와는 서먹한 이유가 뭘까 궁금했던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중 내가 가장 신뢰한 추측은 ‘외할머니가 엄마의 친엄마가 아닐 수도 있다.’라는 것이었다. 엄마를 비롯한 외삼촌들은 모두 오뚝한 코에 작은 얼굴을 가졌는데 외할머니는 짧은 들창코에 피부도 까맣고 둥근 얼굴에 성격도 닮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말이 거의 없으셨고, 말을 하셔도 길게 이야기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반면 외삼촌들이나 엄마는 목소리도 밝고 사람들과 재미있게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만약 외할머니가 친엄마가 아니라면 충분히 서먹할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엄마의 친엄마는 어디에 계신 걸까? 하늘나라에 계신 건가? 등등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두 모녀 사이는 어색했지만, 우리에게는 손주를 사랑하는 여느 할머니와 같이 잘해주셨다. 우리 집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떨어져 있던 외할머니댁에 가는 날은 항상 즐거워 콧노래가 나왔다. 외할머니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지 말라는 잔소리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언니는 막내 외삼촌이 읽던 만화책이나 소설책을 읽고 동생과 나는 근처 산에서 잠자리채로 곤충도 잡고, 외할아버지가 뚝에서 잡아오신 미꾸라지도 만지며 마음껏 놀 수 있었다. 우리가 노는데 정신이 쏙 빠져 있을 때면 외할머니는 부엌에서 계란 프라이와 두껍게 썰은 감자볶음을 만드셨다. 두꺼운 감자가 설익어 서걱서걱 씹히면서 아린 맛이 나도, 마냥 모든 것이 즐겁고 재미있었다. 엄마가 밭일이 바빠서 우리를 잘 돌보지 못할 때에는 외할머니가 직접 집으로 오셔서 우리를 봐주시기도 했는데, 말없이 투박한 음식을 만들어 끼니를 챙겨주시고 수제 간식도 만들어 주셨다. 그날도 외할머니가 우리를 돌봐주시러 오신 날이었다. 햇빛이 가득한 초여름 주말이었는데, 언니는 동네 친구와 함께 공부를 하겠다고 외출 중이었고 남동생은 외할머니와 함께 집 안에 있었다. 언니를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거절을 당한 나는 현관 쪽 단풍나무 위로 올라가 서운함을 삭이고 있었다.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나무 위에서 깜빡 잠이든 사이, 사람의 인기척에 눈을 떠보니 처음 보는 여자가 나를 보지 못한 채 현관 쪽을 두리번거리며 서 있었다. 여자는 나무에서 내려오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 잠시 뒷걸음치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
“안녕하세요.”
“네가 누군지 알겠다. 많이 컸네. 혹시, 집에 엄마 계시니?”
“아뇨. 엄마는 밭에 내려가셨어요. 외할머니는 계세요.”
“아, 그래.”
순간, 많이 실망한 듯한 여자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였다.
“그런데, 누구세요?”
궁금해서 묻는 나에게 여자는 대답은 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저기, 손 한번 잡아봐도 될까?”
고개를 끄덕이는 내 손을 잡은 여자는 살짝 눈물이 비친 눈으로, 어른들에게는 자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이내 바쁜 걸음으로 사라졌다. 약속을 지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집으로 와서 막상 외할머니의 얼굴을 보니 숨길 수가 없었다.
“할머니, 아까 어떤 언니가 왔었어요.”
“언니? 어떤 언니?”
“모르는 언니요. 얼굴 하얗고, 조금 긴 단발머리 언니요. 그 언니가 엄마 집에 계시냐고 물어봤어요.”
외할머니는 잠시 멈칫하시더니 이내 신발을 급하게 신으셨다. 너무 다급해서 신발을 제대로 신지도 못하고 한쪽 신발만 신고 뛰어 나가셨는데, 그 한쪽마저도 벗겨져서 마당에 뒹굴었다. 외할머니의 다급하고 낯선 모습에 놀란 나는 뒤따라 나갔지만 이미 외할머니는 어디를 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30분 정도가 지나서 돌아온 외할머니는 그 여자를 찾지 못한 게 많이 실망스러웠는지 마당 한쪽에 앉아 힘없는 모습으로 땀을 닦으셨다. 할머니는 마실 물을 가지고 나온 나를 붙잡고 그 여자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하나하나 다시 물어보셨다. 특별히 주고받은 내용이 많지 않아서 다 기억하고 말씀드렸는데도 묻고, 또 묻는 할머니의 모습에 내가 큰 일을 만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그날 저녁 내 머릿속엔 왜 외할머니가 맨발로 뛰어나가 셨는지, 그렇게까지 급하게 뛰어 나가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외할머니가 가시기 전 엄마에게도 말씀을 하셨는지 엄마의 얼굴도 어둡고 걱정이 많은 것 같았다. 슬며시 엄마에게 다가가 낮에 왔던 언니가 누구인지 물었지만, 엄마는 슬픈 얼굴에 옅은 웃음만 지어 보이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조금 더 크면 말해 주시겠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하셨다.
어른들은 나를 어리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 여자의 존재가 외할머니와 엄마의 사이를 서먹하게 한 큰 이유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려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나는 더 이상 엄마의 슬픈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내가 어른이 돼도 묻지 않고 내 마음속에서도 그 여자를 지우기로 결심했다. 그 여자를 잊고 지워버리겠다고 다짐한 그날 밤은 하얀 피부에 환한 웃음을 짓던 그 얼굴이 지독히도 지워지지 않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