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풋살 동호회의 전지훈련
작년 11월, 풋살 동호회 단톡방에 뜬금없이 ‘여행 취향 심리테스트’ 링크가 올라왔다.
[당신이 좋아할만한 여행지는 ‘제주도’입니다.]
오, 제주도 좋지! 결과를 캡쳐해서 올렸다. ‘저도 제주도 나왔어요!’, ‘어? 저도요!’ 다들 제주도를 이렇게 좋아했던가? 제주도 당첨자들이 줄줄이 올라오는 걸 보고, 채팅방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왜 다 제주도만 나오는거지? 아니 제주도 좋긴한데...
[회원님들의 취향을 적극 반영하여, 제주도로 겨울 전지훈련을 가겠습니다.]
이 테스트는 전지훈련 TF의 앙큼한 계략으로 드러났다. 제주도 전지훈련을 발표하기 위해 심리테스트를 조작한 것이다. 어쩐지 취향이 참 잘 맞더라니. IT회사 동호회다운 빌드업이었다. 참석 여부를 묻는 투표에 망설임 없이 ‘참석'을 눌렀다.
1년 전의 나라면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신입사원 때는 더 심했다. ‘이런 건 이메일로 보내지, 왜 굳이 전화를 하고 난리야' 회사와 사생활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차가운 도시의 직장인 컨셉에 빠져있었던 나는 회사 사람들이 개인 휴대폰으로 연락하는 것조차 꺼려했다.
[저랑 주말에 소셜 매치 가실 분?]
[우리 유기견 봉사 함께 해요!]
[다같이 국가대표 축구 경기 영화관에서 관람하면 어때요?]
하지만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진다고, 풋살 동호회와 회사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사내 동호회에 걸맞게 우리 동호회 안에는 원활한 동호회 활동을 지원하는 여러 TF(Task Force)들이 있고, 이 중 계절에 맞춰 외부 활동을 기획하는 조직이 바로 ‘춘하추동(春夏秋冬)’이라고 불리는 전지훈련 TF이다. 이들은 날로 두터워지는 동호회의 친목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갑작스러운 제주도행 제안에도 20명의 동호회원 중 12명이 참석했다는 사실이 이를 한번 더 증명해주었다.
공지를 올린 사람은 전지훈련 TF 3인방 중 최고참 선배인 정은영 매니저였다. 셔츠에 슬랙스, 일잘러 선배미를 한 층 돋보이게 해주는 안경까지. 사내 방송에도 단골 출연하는 프로 직장인이지만 풋살장에서는 최전방에서 빵빵 골을 때려넣는 반전 매력의 소유자이다.
가볍게 대성리로 떠났던 첫 번째 전지훈련에서는 저녁 레크리에이션 MC로 활약하며 유재석 뺨치는 진행 실력을 보여주었다. 특유의 유머는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동호회 최고참이기도 한 그녀에게 누군가 “동호회 회장이에요?”하고 물었더니, “아뇨, 노장이에요~”하고 시크하게 대답했던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2024년 1월 11일 목요일, 새해 버프 받기 아주 적절한 시기. 다음 날 단체로 연차를 낸 낡고 지친 직장인들이 퇴근하자마자 김포 공항으로 달려갔다. 비행기에서 기절했다 일어나니 금세 제주도에 도착했다. 미리 빌려놓은 렌터카를 타고 숙소에 가니, 역시나. 한 발 빠르게 반차를 내고 미리 와있던 전지훈련 TF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숙소 거실에는 구원 식량 패키지가 쫘르륵 펼쳐져 있었다. 차가운 물을 부어도 5분만 지나면 팔팔 끓는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한라산 필수템 라밥(라면+밥)과, 틈틈이 에너지를 보충해줄 각종 간식, 추운 설산도 끄떡 없이 버티게 해줄 핫팩까지. 나는 제주 바다처럼 밀려오는 감동과 식량 패키지를 품에 안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 4시. 으어어어어. 아직 한라산 근처에도 못갔는데 어디선가 짐승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설레는 마음에 잠을 설쳐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출근에 길들여진 짐승들은 저절로 옷을 입고 가방을 쌌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잠을 깨우고,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한 숲길을 달려 접선지로 향한다.
접선 시간과 장소는 ‘6시, 한라산 근처 공영 주차장’.
어둠 속에서 등산 장비 대여 업체의 봉고차가 스르르 등장한다. 간이 테이블을 펼치고는 등산화, 등산 스틱, 아이젠과 무릎보호대까지 가져온 장비들을 착착착 펼쳐놓는다. 대여 리스트를 보며 분주하게 장비를 챙기고, 한라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해도 뜨지 않은 아침 7시. 여기가 한라산인지 시장통인지. 10시간이 넘는 등반을 하러 온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놀라며 한 줄로 대열을 맞췄다. 전지훈련 TF의 든든한 다리, 김수진 매니저가 셰르파 역할을 자처했다. IT회사인 우리 회사의 인프라 조직에서 일하는 그녀는 TF에서도 각종 활동의 기반을 책임지는 행동 대장이다. 풋살에서는 후방에서 공을 찔러주는 정확한 패스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덕에 공격수들은 앞쪽으로 쭉 밀고 올라가 골을 넣을 수 있게 된다. 위치는 정 반대지만, 그녀가 우리를 한라산까지 올려줄 수 있을 거란 믿음은 똑같았다.
철컥, 철컥, 철컥. 체인이 둘둘 감긴 등산화를 신은 12명이 걷고 또 걸었다. ‘우리가 정말 한라산에 온 거에요?’ ‘이 시간에 여기 있는게 꿈 같아요.’ 재잘대던 사람들이 금세 조용해졌다. 겹겹이 옷을 껴입고 물과 식량으로 가득한 가방을 메고 걷다보면 금방 입이 다물어지기 마련이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8시가 가까워지니 순식간에 날이 밝았다. 눈 앞에 펼쳐지는 새하얀 설산. 등산로 옆에는 아무도 밟지 않은 고운 눈이 짙은 녹음과 대비를 이루며 빛나고 있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서로 공유하며 또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딛는다.
어느새 대열이 좀 바뀌었다. 풋살로 갈고 닦은 체력을 뽐내며 묵묵하게 걷는 첫 번째 그룹. 중간 중간 ‘타임!’을 외치며 쉬는 시간을 마련해주는 마지막 그룹. 나는 마지막 그룹이 타임을 외칠 때 마다 ‘어우 너무 감사합니다'를 속으로 외치는 동시에 앞 그룹에게 “잠깐 쉬었다 갈게요~”를 재빠르게 전달하는 중간 그룹이었다. 몇 번의 타임과 집중 걷기 시간이 지나가고, ‘다리 아픈데, 한 번만 더 쉬면 안되나'하고 눈치를 보던 순간 뒤에서 또 타임 요청이 들어왔다.
신나게 스톱을 외치고 등산로 한켠에서 초콜렛과 젤리를 하나씩 까먹고 있는데, 뒷 그룹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야?하고 내려가니 동료 한 명이 울상을 하고 주저 앉아 있었다. 알고 보니 등산 용품 대여 업체에서 잘못된 사이즈의 등산화를 주는 바람에 자기 발보다 큰 등산화를 신고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동료를 옆에서 꼼꼼하게 살펴주고 있던 건 바로 권은수 매니저, 전지훈련 TF의 막내였다. 구호 용품함에서 얻은 밴드와 비상약으로 조치를 하고, 여분의 양말을 하나 더 신어 신발이 덜컹거리지 않게 도와주었다. 자기 때문에 등반이 늦어질까봐 미안해하는 동료를 다독이고, 다시 힘차게 걸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응원 구호까지 외쳐준다.
장난치는 것을 워낙 좋아해 늘 동호회원들과 투닥이지만, 알고보면 누구보다 마음 여리고 세심하다는 걸 동호회원 모두가 알고 있다. 풋살을 할 때도 누구보다 화이팅 넘치는 그녀. 이길 때도 질 때도 늘 ‘사랑해~’를 외치는 러블리한 그녀는 모두가 안전하게 한라산 등반을 마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힘을 북돋아주었다.
오전 11시. 등산을 시작한지 4시간이 지나고 등산로 주변에 구름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렇다. 바로 여기가 한라산 정상이다. 목표했던 시간에 정확하게 도착한 우리는 고이 챙겨온 동호회 현수막을 펼치고 한라산 비석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빨간 현수막에 적혀있는 우리 동호회 이름이 펄럭였다.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12명이 다 함께 프레임 안에 들어왔다. 우리가 백록담 앞에서 개인 사진도 찍고, 부모님과 영상 통화도 하고, 눈오리도 만들며 노는 동안 전지훈련TF는 부지런히 주변을 스캔하며 밥 먹을 공간을 찾았다.
바람이 매섭게 부는 한라산 정상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먹은 라면밥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만큼 꿀맛이었다. 양이 꽤 많은데?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웠다. 올라올 때 힘들었던 기억은 어느새 사라졌고, 뿌듯함과 성취감만이 남아 라면 맛을 더 살려줄 뿐이었다.
전지훈련TF가 처음 생겼을 때만 해도 이렇게 멀리, 높은 곳에 함께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풋살 동호회에 처음 가입할 때 우리가 이렇게 가까워질지 몰랐던 것처럼. 풋살 동호회 창단 1년만에 한라산 정상에 오른 우리는 이미 전지훈련의 만렙을 찍었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6개월 후, 카톡방에 또 다시 공지가 올라오기 전까지는.
[다음 전지훈련 장소는 ‘독도’입니다.]
* 선수 이름은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