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풋살 동호회의 칼퇴 라이프
수요일은 사내 풋살동호회에 가는 날. 7시에 시작하는 훈련에 늦지 않으려면 바삐 움직여야 한다. 회의록 작성, 다음 회의 자료 정리, 팀장에게 논의 사항 공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처럼 분주하게 움직인다. 6시다! 바로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대용량 텀블러 준비. 물은 꼭 회사 정수기에서 퍼가야 제 맛이다. 얼음까지 꽉꽉 채워 담는다.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회사 앞 김가네에서 김밥 한 줄을 주문하고 앉았다. 막상 일을 끝내고 나오니 조금 피곤한 것 같기도 하다. 혼자하는 운동이었으면 조용히 나와의 약속을 취소할 수 있었겠지만, 든든한 동료들 앞에서는 취소의 ㅊ자도 꺼낼 수 없다. 어차피 대차게 까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누워야지. 여긴 누울 자리가 아니라 뛸 자리다.
“안녕하세요!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지? 지난 주에 못와서 그런가봐. 요즘 많이 바빠요? 아, 새로 나왔다는 상품 그 팀에서 담당하시는구나. 정신 없으시겠어요. 그래도 오늘은 야근 안해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회사를 탈출한 회사원들의 얼굴은 여름 저녁 7시만큼 밝다. 한 주만 못봐도 아쉬운 동호회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탈의실로 향한다. 탈의실 안이 벌써 후끈하다. 서둘러 가방에서 유니폼을 꺼낸다. 각자 선택한 등번호가 적혀있는, 세상에서 하나 뿐인 유니폼이다. 나의 등번호는 8번. 8번을 옆으로 누이면 무한대를 뜻하는 기호가 된다. 영원히 풋살을 하고 싶다는 염원...을 담은 것은 아니고 사실 아무거나 고르고 나중에 의미를 끼워맞췄다.
상의는 흰 바탕에 우리팀 로고와 등번호, 이니셜을 남색으로 박았다. 귀여운 카라가 포인트. 남색 반바지와 찰떡이다. 경기용 유니폼도 따로 있다. 시합에서 빠르게 우리 팀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빨간색으로 만들었다. 그렇다. 우리 팀 유니폼은 내가 만들었다. 물론 혼자 만든 것은 아니고, 우리 동호회에는 여러 TF가 있는데, 나는 유니폼 TF의 장을 맡고 있다. 대회에 나갈 때 마다 다른 팀 유니폼을 훑어보고 ‘역시 우리 팀 유니폼이 제일 예쁘군'하며 흐뭇해하는 것이 나의 은밀한 즐거움.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처음에는 쳐다만 봐도 얼굴이 빨개지던 회장님은 1년이 지나니 준비운동 구령 정도는 뽀얀 얼굴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월요일에는 현역 풋살 선수이신 코치님께 강습을 받고, 수요일에는 우리끼리 경기를 뛰며 실전 훈련을 한다. 다행히 비도 안오고, 인원도 10명이 알맞게 모였다. 풋살은 원래 실내 스포츠지만, 실내 구장 대여료는 야외 구장의 2배다. 장마 시즌이 되면 일주일에 이틀만이라도 비가 오지 않기를 빌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하프 라인에 놓인 공을 힘껏 차며 경기를 시작한다. 재빨리 빈 공간으로 뛰어 들어간다. 몇 번의 패스를 거쳐 나에게 공이 도착했다. 찬스다. 굴러온 공을 침착하게 잡고 골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는데, 으악, 언제 온거야. 눈 깜짝할 새에 상대편 수비수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수비수를 피해 슈팅을 날려보지만 골키퍼에게 딱 걸렸다. ‘괜찮아요!! 위치 선정 너무 좋았어요! 다시 해보자!’ 쏟아지는 말들이 아쉬움을 밀어낸다. 오케이, 다음에는 꼭 넣는다.
“헤이! 은주, 은주! 받아!!”
둥근 공 앞에서 직급과 연차는 사라진다. 우리 회사의 공식 호칭은 ‘매니저'다. 처음 동호회를 시작할 때만 해도 서로 이름을 부른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철한 법. ‘ㅁ..매니저님! 패스요!’ 아니, 매니저 누굴 말하는거야? 누구를 부르는지도 모르겠고, 일단 너무 길다. 지금은 1년차 신입도 잔디 위에서는 10년 차 선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당연해진 우리다.
공을 이리저리 굴리며 패스 줄 타이밍을 노려본다. 내 옆에 있던 김소민 매니저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뛰어 올라간다. 슉슉. 슉슉. 바스락 거리는 바지가 내는 소리는 그녀의 체대생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하나로 길게 묶은 머리카락이 초원 위를 질주하는 말 갈기처럼 보일 정도다. 저런 에너지를 회사에서 어찌 감추고 살았을까? 바로 뒷자리에 있어도 메신저로 말을 걸던 내향적인 개발자는 온데간데 없다.
잠시 쉬는 시간.
“저 지난 주부터 헬스 시작했잖아요. 몸싸움 이기고 싶어요.”
“오오오. 저도 할래요! 저한테 부딪히는 사람들 다 날려버릴 거예요!"
“혹시 주말에 소셜 매치 갈 사람 있어요?”
바닥에 철푸덕 둘러 앉는다. 풋살을 하고 있으면서 계속 풋살 얘기만 한다. 풋살과 축구의 차이점도 모르던 여자들이 풋살화를 사고, 매주 2회씩 풋살을 하고, 풋살 대회에 나간다. 돈을 모아 전지 훈련도 간다. 풋살을 잘하고 싶어서 헬스를 시작하고, 주말에 추가 훈련까지 한다. 풋살을 안지 1년 밖에 안됐으면서, 풋살 없는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 눈이 반짝인다.
다시 시작이다. 공을 앞에 두고 드리블을 해본다. 앗, 실수다. 상대팀 박지은 매니저가 순식간에 공을 빼앗아 간다. 무거워진 다리에 포기하려던 찰나, 이번엔 우리팀 정은영 매니저가 몸을 날려 공을 막는다. 나이스. 공이 상대팀 골대 앞으로 뻥 날아간다. 이번에는 진짜 내 차례다. 1년 전이었으면 당연히 놓쳤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를 꽉 깨물고 뛰어가 오른발 안쪽을 공에 갖다 댄다. 됐다! 그물망이 세차게 흔들린다. 낮에는 의자에 봉인되어 있던 몸이 해방감에 춤을 춘다. 예스! 예스! 예스!
2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우르르 몰려나와 풋살화를 벗고 신발을 갈아신는다. 땀이 쉴새없이 흐른다. 유니폼은 푹 젖어버린지 오래다. 얼음도 다 녹아버렸다. 옆에 있던 동료가 물을 건넨다. 얼른 목을 축이고 돌려주려는데, 미끄덩. 땀 범벅인 팔끼리 닿자 동시에 몸서리를 친다. 아우, 증말! 저리가요! 두 뺨이 벌겋게 올라온 축축하고 뜨거운 여자들이 와하하 웃는다.
*선수 이름은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