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풋살 동호회에 가입하다
날씨 어플을 보니 이번 주말부터 다음 주까지 비구름이 줄줄이다. '더보기' 버튼을 눌러보지만 똑같은 비 표시가 일주일 연장됐을 뿐이다. 점심 시간, 장마 소식을 들은 회사 동료들은 출퇴근 지하철에서 땀 뻘뻘 흘릴 걱정을 하거나 빨래에서 쿰쿰한 냄새가 나겠다며 제습기를 추천 받고 있었다. 하지만 비 소식을 들은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따로 있다.
“아, 풋살 못하면 어쩌지?”
요즘 ‘저속 노화&급속 사망'이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라고 한다. 언뜻보면 섬뜩해보이지만 뜻을 살펴보면 현대인의 제 1 소망을 그대로 담은 말이다. 천천히 건강하게 나이 들다가, 아프지 않고 빠르게 죽기. 육식과 인스턴트 위주의 식습관, 불규칙한 수면,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저속 노화&급속 사망'은 누구나 이룰 수 있는 쉬운 목표가 아니다. 나도 20대까지는 운동과 담을 쌓고 살았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면서, 매년 한 줄씩 늘어나는 건강검진 종합소견란을 보니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골골대던 현대인의 한 명으로서 생활 습관 개선은 물론이고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 취미 하나는 꼭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뻔하게도 시작은 헬스였다. 집 근처 헬스장에 호기롭게 등록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기부로 끝났다. 능수능란하게 운동 기구를 다루며 땀 흘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런닝머신만 뛰다가 오기를 몇 번. 점점 헬스장 방문을 미루기 시작하더니 결국 등록한 6개월 중 한 달도 채 다니지 못했고, 사물함에 넣어놓은 운동용 신발을 가지러 간 것이 마지막 방문이 되었다.
다음으로는 지루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아보겠다며 각종 학원과 원데이 클래스를 전전했다. 누가 “이 운동 해본 사람?”하고 물어보면 10번에 9번은 손을 들 수 있을 정도이다. 복싱, 발레, 주짓수, 폴댄스, 방송 댄스, 클라이밍, 필라테스, 크로스핏, 줌바댄스… 몇 년 안에 이렇게 많은 운동을 경험했다는 것을 다시 말하면 하나의 운동을 길게 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 된다. 한 종목 당 최대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강사가 자꾸 던지는 사담이 마음에 안들어서, 건강하려고 한 운동인데 자꾸 다쳐서, 운동 센터의 과한 친목이 불편해서 등 그만 둔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시도해본 종목이 열 손가락을 채우자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나에게 끈기가 없어서 그런건 아닐까?’, ‘나는 원래부터 꾸준하게 운동할 수 없는 사람인가?’ 애초에 내 인생에 운동이라는 건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취미 하나 만들겠다고 이렇게까지 노력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이 많은 운동 중에 나에게 맞는 운동은 없을까? 언제쯤 나는 한 운동에 정착할 수 있을까?
정답은 따로 있었다. 내가 찾지 않았다. 풋살이 나를 찾아왔다.
2023년 초 겨울. 새해를 맞이해 또 어떤 운동을 찾아봐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안해본 종목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회사에 출근해 노트북을 켜고 사내 인트라넷에 들어갔는데, 공지사항 게시판에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다.
<사내 여자 풋살 동호회 신입 회원 모집>
사내에 여러 동호회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긴 했으나, 연차가 높으신 선배들만 활동한다는 선입견이 있어 가입은 시도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알고 보니 우리 팀에도 이미 여자 풋살 동호회에 가입한 동료가 2명이나 있었다. 일주일에 2번,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초보자가 많을 것을 고려해 2번 중 1번은 코치를 초빙해 기초 강습을 한다고 했다. 게다가 회사에서 동호회 지원금까지 나온다고 하니, 가입을 안할 이유가 없었다.
사내 메신저를 통해 동호회장에게 가입 의사를 밝히니 바로 가입 완료. 초간단 가입 절차를 밟고 바로 다음 훈련부터 참여하기로 했다. 회사에 다니면서 신규 동호회 홍보글이 전사 인트라넷에 올라온 건 처음 봤다. 그래서 동호회장이 누굴까 정말 궁금했다. 새로 동호회를 만들고, 전사 공지에 회원 모집글을 올리고, 심지어 동호회명 공모전까지 열었다. 굉장한 인싸가 아닐까 생각했다.
막상 만나보니 대 반 전.
사람들이 쳐다만봐도 얼굴이 화르륵 빨개지고 목소리가 작아지는 친구였다. 3년차 밖에 되지 않은 주니어 사원이었는데, 나와도 같은 층에 근무하고 있는 부서 동료였다. 같은 팀 동료들에게도 풋살 하는 걸 말한 적이 없다고 했다. 너무 일을 크게 벌리는 것 같아 많이 망설였지만, 풋살을 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직 풋살을 하는 여자들이 많이 없어 남자들 틈에 섞여서 풋살을 하곤 했는데, 마음이 맞는 여자 동료들과 팀을 이루고 정기적으로 운동하고 싶다는 생각에 용기를 낸 것이다.
그 말을 듣던 나의 마음에는 부러움과 함께 불안감이 차올랐다. 어떻게 하면 하나의 운동을 저렇게 좋아하고 계속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이번에 마의 3개월을 넘길 수 있을까.
대망의 첫 훈련날. 구기 종목이라고는 중고등학교 때 해본 피구가 전부였던 나는 발로 공을 컨트롤하는 것에 영 재능이 없어보였다. 발 안쪽으로 공을 차는 '인사이드' 패스, 발 바깥쪽으로 공을 차는 '아웃사이드' 패스 정도 밖에 안배웠는데, 어쩐지 바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배웠다고 패스가 제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10분간 뛰는 것 조차 버거웠다. 공만 보고 졸졸 따라다니다가, 막상 공이라도 받으면 어디로 차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아무렇게나 날려버렸다.
아 이것도 아닌가…? 5:5 풋살을 5:4로 만드는 실력은 아무래도 민폐가 아닐까? 또 한 번 의심이 피어오르던 그 때, 회장님이 화려한 드리블로 수비수들을 제치고 골대 앞까지 공을 몰고 갔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던 뽀얀 얼굴은 온데간데 없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대충 공을 따라 함께 골대 앞으로 뛰어갔는데, 회장님이 툭 건넨 공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발에 맞았고, 그대로 골대에 빨려들어갔다.
와아아아아아!!!!!
처음 맛보는 도파민이었다.
그게 새로 들어온 신입 동호회원을 장기 회원으로 만들기 위한 리텐션 전략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1년 6개월이 지난 지금 날씨 어플을 보던 (구)운동 유목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 맞으면서 풋살 하는 것도 재밌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