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부터 웹툰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마음의 소리' '쌉니다 천리마마트' 등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버스에서는 웹툰을 보곤 했다.
요즘도 가끔 보는데, 요즘 웹툰들은 이런 설정이 있다.
요컨대 대의를 위해 힘을 숨기고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를 바꾸는 인생.
옛날 동화를 읽으면 보이는
모든 악당들을 물리치고,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바꾸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다.
나의 초등학교 6학년은 남들과 조금 달랐다.
우리 동네는 소위 '뺑뺑이'라고 하는 과정을 거쳐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 방식은 중학교를 랜덤으로 지정해 주는 곳으로 가야 한다.
대부분이 이런 방식이었지만 나의 경우에 이 '뺑뺑이'가 무엇이 문제냐 한다면
우리 동네엔 명문 중학교, 그냥 평범한 중학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꼴통 중학교가 있었다.
우리 엄마는 꼴통 학교만은 안된다며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했다.
하지만 이건 유명한 클리셰이지 않는가
우리 엄마의 기도는 하늘에 닿지 않았다.
나는 결국 이듬해 꼴통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남자들이 그런 건지 나만 그랬던 건지
나는 들어가자마자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이곳은 꼴통 학교이기 때문에 도태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학기 초 같은 반 아이의 턱에 주먹을 날렸다.
이유는 타당했다. 그 아이도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던 건지
나에게 부모욕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치고받고 싸웠다.
덕분에 우리 엄마는 학기 초부터 위원회에 불려 갔다.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이 끝난 후 학교 생활이 조금은 바뀌었다.
같은 반에서 소위 일진이 끝나고 같이 집에 가자고 한다. 인정받은 기분이다.
그들 무리와 같이 걸어가다가 그들이 어둑한 골목으로 들어가고
나는 처음으로 보았다. 아이들이 흡연을 하는 모습을
"담배 없어? 하나 줄까?"
태우면 안 된다. 엄마가 힘들어하실 거다. 하지만 나는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됐을 때야 후회하지만, 고작 14살이 거부할 수 있었을까
불을 붙이고 이내 콜록거리고, 옆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나의 중학교1학년은 그렇게 담배연기와 함께 지나갔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나는 1학년 때 담배도 태우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면서 살았다.
그 기억을 가지고 학기를 시작하니 어김없이 학기 초에 싸우는 친구들을 말렸다.
이제 나는 저렇게 하지 않아도 여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하필 내가 말린 아이가 우리 학교 제일 센 모임의 아이였다.
쉬는 시간, 그의 부하가 나에게 찾아온다.
"야 OO가 너 화장실로 오래."
화장실로 가니 양변기 칸에서 담배연기를 뿜으면서 그가 나온다.
보자마자 느꼈다. 이건 규격 외다. 학교에서 담배를 태우는 미친놈은 이길 수 없다.
그 자리에서 뺨을 피가 날 때까지 수차례 맞았다. 나는 반항할 수 없었다.
그가 동네에서 잘 나가는 형이 있어서,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이어서
반항조차 하지 않았고 그냥 맞았다.
괴롭힘이라는 건 단어 세 글자로 표현이 안된다.
괴롭힘 하나로 사람을 광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 후로 나는 수업시간에 내 돈으로 그의 빵을 사러 매점에 다녀와야 했다.
그가 문자 횟수가 없으면 내 핸드폰으로 여자들과 연락했고,
그의 게임 아이디 레벨을 올려야 돼서 피시방에 다녔다.
쉬는 시간엔 기절놀이라며 숨을 막히게 하고 기절시켰다.
주말에 그가 전화하면 달려 나갔어야 했다.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나의 15살 기억은 이것뿐이다.
외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왜 반항하지 않았냐고?
15살에게 16살은 학생주임보다 무서운 존재다.
그의 주위에 그 나이의 아이들이 깔려있는데 도저히 반항할 수가 없었다.
웹툰처럼 과거를 바꾸기 위해 지금 생각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목을 물어뜯어서라도 괴롭힘 당하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남들은 중2병이라고 부르는 중학교 2학년에 나의 성격이 많이 변했다.
밝고, 감정에 솔직해 자주 삐지고 잘 웃던 나는 그때 죽었다.
내 인생에서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건
하나님도, 부모님도, 사랑하는 여자친구도 아니다.
저 놈이다.
몇 번의 자살시도를 했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가 나를 죽였던 횟수만큼 나는 머릿속으로 그를 죽였다.
"일진들은 나중에 잘 못 살 거야. 꼴통들이 허드렛일이나 하겠지."
아니다. 어릴 때 놀았던 애들이 커서도 잘 산다.
학교 다닐 때 아이들을 괴롭힌 사람이 드라마에서 일진 역할을 잘 소화한다.
혹은 나는 가난에 허덕일 때, 비트코인 투자를 통해 수천억을 벌어들이곤 한다.
학교에서 징계를 받은 아이들을 모아서 그들을 치유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남들 눈에서 피눈물 나오게 하는 사람들은, 그 돈으로 호의호식한다.
나는 몇 번 이야기했지만 개신교다.
누군가는 "하나님이 벌을 주실 거야."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천벌이라고 불리는 번개를 맞아 죽은 사람 중엔 선한 사람도 있다.
세상에 권선징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신교에서는 많은 것들을 강조하지만 '용서', '감사'라는 것도 강조한다.
나는 10년도 더 지난 지금은 사실 그놈을 용서했다.
내 마음이 동해서 용서를 한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그를 몇 번을 죽였을까?
그냥 단지 내가 앞으로 눈 감기 전 살아가는 모든 시간에
용서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몇 번이고 그를 머릿속에서 죽일 것이다.
세상이 그에게 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이상
나는 하나의 악인 때문에 내 삶을 살아갈 수가 없게 된다.
사실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뒤에서 욕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 무게가 얼마나 무겁든, 뒤에서 팀장을 욕하고 친한 친구를 욕한다.
나만해도 지금도 글로 욕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인간들 때문에 내 생각까지 사로잡히면 안 되는 것 같다.
본인 인생을 이렇게 만든 전 와이프를 저주해 지하철에 불을 지르려 한 사람이
내가 그를 머릿속으로 수천번, 수만 번 죽이면서 살아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기에 감옥에 가겠지만,
내 머릿속에서 저지른 범죄는 사형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내 생각은 무기력해 보이겠지만,
나는 종교적인 이유를 떠나 나를 위해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상상으로 죽이는 것이 다라면,
세상이 악한 사람을 벌하고 선한 것을 권장하는 사회가 아니라면
차라리 용서하고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나는 내 삶에서 '나를 괴롭힌 그놈'보다
'그놈 때문에 상처 입은 나'를 더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