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공화국의 민낯

재건축의 환상, 슬럼화의 현실

by 도진

30년 된 아파트, 여전히 황금알일까


한때 30년이 넘은 아파트는 ‘기회의 땅’이었다. 낡은 외관, 불편한 구조, 불안한 배관도 괜찮았다. 재건축이 되면 평수가 늘고, 새 아파트가 되고, 무엇보다 ‘일반분양’으로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의 차익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식은 깨지기 시작했다.


건축비는 상승 곡선을 멈추지 않고 있고, 금리와 금융규제는 조합의 자금조달을 가로막는다. 분양가 상한제, 철거·이주 비용, 공사 지연에 따른 손실 등으로 사업성 자체가 ‘나오지 않는’ 단지가 늘고 있다. 강남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경기도 일부 신도시조차 수익구조가 안 맞아 좌초되는 상황이다.


한계는 뚜렷하다. 과거엔 아파트를 오래 갖고 있으면 언젠가 ‘신축'이 되었지만, 지금은 단순히 오래된 집이 되어간다. 재건축은 더 이상 자동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남는 건 ‘환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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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지가 결정하는 생존


재건축이 가능한지 여부는 ‘법적 연한’이나 ‘관리 주체의 역량’보다 그 입지에 얼마나 사람이 몰리느냐에 달려 있다. 서울 중심, 교통 요충지, 학군지, 업무밀집지역은 여전히 인구 유입이 있고, 분양가가 건축비를 충분히 커버한다. 이런 곳은 앞으로도 살아남고, 신축으로 진화하며 자산으로서의 가치를 지킨다.


하지만 지방 중소도시, 수도권 외곽, 인구 감소 지역은 다르다. 수요가 줄고, 거래가 뜸해지고, 기존 입주민도 고령화되어 조합을 꾸리기 어렵다. 재건축은커녕, 유지·보수조차 제때 이뤄지지 않는다. 그 결과, 노후화된 아파트는 단순히 낡는 것이 아니라 '슬럼화'된다.


입지 불균형은 주거 양극화를 넘어 ‘삶의 격차’로 확대되고 있다. 같은 면적, 같은 구조의 아파트라도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생존 여부가 갈리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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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그 먼 미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일본은 이미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만들어낸 ‘빈집 대국’이다. 2023년 기준, 일본 전체 주택의 13.8%인 900만 채가 공실 상태이며, 이 중 상당수가 방치된 ‘슬럼 주택’이다. 한국도 약 153만 호, 7.9% 수준으로 일본의 20년 전 상황을 따라가고 있다.


일본의 실패는 단순히 단독주택 구조 때문만이 아니다. 핵심은 ‘입지 없는 집’은 아무리 리모델링을 해도, 아무리 세금 인센티브를 줘도 살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일본은 공실대책법, 빈집 데이터베이스 구축, 공공임대 전환 등 다양한 정책을 내놓았지만, 도쿄 도심은 살아났고 지방은 더 버려졌다.


한국 역시 같은 구조적 딜레마에 접어들고 있다. 고령화된 단지, 줄어드는 수요, 가격을 떠받쳐줄 신규 인구가 없는 곳. 이곳의 아파트는 자산이 아니라 ‘사회적 짐’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과연 서울 강북 일부, 경기도 남부, 지방광역시 외곽은 이 미래에서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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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축이 아니라, 생존의 시대다


이제는 모든 아파트가 재건축될 수 있다는 전제가 사라지고 있다. 주택의 생존은 건물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전략이 되어가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는 더 이상 ‘전국 단위의 일률적 재개발 모델’에 기대선 안 된다. 오히려 일본처럼 계획된 축소(Planned Shrinkage)가 필요한 시점이다.

고령층 중심 지역은 공공주택/복지시설로 재편하고,

입지 좋은 지역에 인프라와 개발을 집중하며,

빈집은 공공이 매입해 공유자산으로 관리하는 방식.


또한, 슬럼화 위기지역은 ‘재생 불가’ 판정을 내려, 리츠(REITs) 방식으로라도 보존 가치를 되살리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제는 ‘재건축 가능성’이 아니라 ‘도시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가 핵심 질문이다.



맺으며


아파트는 한국인의 자산이자,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것이 ‘입지 기반 선택 자산’으로 분화될 것이다. 재건축은 더 이상 권리가 아니라, 조건을 충족한 입지만이 가질 수 있는 ‘프리미엄’이다.


“남는 집이 아니라, 남는 입지에 지어진 집만이 살아남는다.” 우리는 이제 아파트 공화국이 만들어놓은 이 위계 속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정리할지 선택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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