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차 전략가의 사색] 생각하는 방식

생각의 속도와 무게에 대하여

by 도진

가끔은 보고서를 쓰기 전 빈 화면을 오래 바라본다.


무엇을 쓸지는 대강 정해졌고, 클라이언트도 “그거, 한번 정리해봐 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그게 어떤 현상에 대한 정리이든, 혹은 막연한 가능성을 구체화해 달라는 주문이든, 내 일은 늘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말을 먼저 꺼낸 쪽은 대개 방향이 어렴풋할 뿐이다. 그 어렴풋한 질문에 나름의 논리를 입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스토리로 만들어내는 것. 그게 내가 27년 동안 해온 일이었다.


보고서는 늘 스토리라인으로 시작한다.


일종의 메시지다. 이번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들의 관심사는 뭘까,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 어떤 인상을 남기고 싶을까. 이걸 정리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린다. 아무리 익숙해도, 메시지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써낸 수백 건의 보고서 중에서도 단박에 메시지가 떠오른 건 드물었다. 오히려 처음에 품었던 메시지가 나중에 송두리째 바뀌는 경우도 많았다.


메시지를 어느 정도 잡으면, 다음은 프레임워크다. 구조다.


어떤 방식으로 내용을 배열하면 흐름이 자연스럽고 설득력이 있을까. 상하관계로 나열할까, 시간 순서로 그려볼까, 아니면 문제-해결 구조로 짤까. 여기서도 머릿속에서 수많은 모형들이 떠오르고 사라진다. 하나를 세워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불안한 모서리가 자꾸 눈에 밟힌다. 다시 고친다. 이 프레임워크가 말하려는 메시지를 충분히 담을 수 있을까. 문장을 쓰기 전까지는 거의 이런 조립 작업이 이어진다.


그다음엔 콘텐츠다.


말만 번지르르한 보고서가 되지 않으려면, 실체가 있어야 한다. 숫자든 사례든, 비교든 인용이든, 누가 봐도 “그럴듯하다”가 아니라 “그렇다”라고 수긍하게 만드는 근거들이 필요하다. 여기서 자료를 찾다 보면 처음에 잡았던 메시지가 흔들릴 때도 많다. 그럴 때면 다시 앞으로 돌아간다. 메시지를 조정하고, 프레임워크를 손보고, 콘텐츠도 새로 보완한다. 이 작업을 몇 번쯤 반복하다 보면, 생각이 점점 단단해지고 문장의 무게가 생긴다. 보고서를 다 쓰고 나면, 머릿속에는 하나의 질문에 대해 나름의 철학이 자리 잡는다. 그게 내가 보고서를 쓰는 이유였고, 방식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순서가 흔들린다.


이제 나는 종종 그 어렴풋한 메시지와 엉성한 프레임워크를 안고 바로 ChatGPT를 만난다. 그러면 참 신기하게도, 제법 그럴듯한 보고서가 나온다. 구조도 그럴싸하고, 표현도 부드럽다. 예전 같으면 사흘은 고민했을 내용이 30분 만에 정리된다. 속이 다 시원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이게 정말 내가 정리한 생각일까. 혹시 내게 필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과정’이었던 건 아닐까.


생각이란 게 원래 그리 매끄러운 것이 아닌데, AI는 너무 매끄럽다.


내가 아직 제대로 고민하지 않은 것을 먼저 정리해 버리는 느낌. 그래서 오히려 확신이 줄어든다. 전에 내 보고서에는 자잘한 주저함과 고심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이제는 그런 꺾임 없이, 매끄럽게 이어진문장이 AI로부터 나온다. 보기엔 좋다. 읽기도 편하다. 하지만 그 문장 안에, 내가 얼마나 고민했는지가 빠져버린다.


물론, ChatGPT는 훌륭한 도구다. 내가 전에 했던 고민을 빠르게 재현하거나, 잊고 있던 맥락을 끌어오는 데는 탁월하다. 어떤 새로운 이슈를 검토할 때, 관련 개념과 사례들을 빠르게 훑고 머리를 정리하는 데에도 더없이 유용하다. 보고서 초안을 잡을 때, ‘빈 화면’에 대한 공포도 덜어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편해진 만큼 나의 사고는 무뎌지는 듯한 느낌이다.


이쯤에서 나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왜 이 일을 해왔는가. 보고서를 완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더 빨리, 더 잘 만드는 도구가 있다면 그걸 쓰면 된다. 하지만 그 모든 보고서들이 내게 남긴 것은 사실 결과물이 아니라, 그걸 만드는 과정에서 내 안에서 태어난 질문과 논리, 확신과 반성이다. 나는 생각을 전달하려 했지만, 사실은 그 과정을 통해 나도 성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하기로 했다.

ChatGPT를 바로 찾기 전에, 내가 쓸 문장의 뼈대를 머릿속에서 한 번 더 그려본다.


불완전하더라도 내 나름의 논리를 먼저 세운다. 가능하다면 손으로 써보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야 AI를 만난다. 그러면 그제서야 AI가 내 파트너처럼 느껴진다. 내 생각을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 생각을 더 날카롭게 해주는 존재. 그렇게 AI와 나 사이의 거리도, 생각의 밀도도 조금씩 조정된다.


27년차 전략가는 여전히 생각 중이다. 생각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고 있다.


생각의 속도와 무게 사이에서, 나는 아직 중심을 잡고 있는 중이다. 예전처럼 느리고 무거운 것도, 지금처럼 빠르고 가벼운 것도 아닌,


나만의 균형점을 찾는 중이다.


사실, 그게 전략이라는 단어가 품은 본질 아닐까. 변화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방향을 잡아주는 일. 나는 지금, 내 생각의 방향을 다시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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