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뇌에서 쓰는 뇌로의 진화

독서가 글쓰기로 완성되는 뇌과학적 순간

by 이연숙 박사

책은 곧잘 읽는데 막상 백지 앞에서는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얼어붙는 아이들이 많다. 수많은 텍스트를 거침없이 소화해 내던 아이의 뇌가 글쓰기 앞에서는 왜 갑자기 작동을 멈추는 것일까? 이는 단순히 어휘력이나 문장력의 부족이 아니라,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향'이 완전히 뒤바뀌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인지적 과부하 때문이다.


소비하는 뇌와 생산하는 뇌의 차이
미국 터프츠 대학교의 인지신경과학자 매리언 울프(Maryanne Wolf, 2007)는 저서 『책 읽는 뇌』를 통해 인간은 본래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으며, 독서는 뇌의 시각, 언어, 인지 영역을 새롭게 연결하여 만든 후천적인 기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글쓰기'는 이 읽는 뇌를 바탕으로 한 차원 더 높은 도약을 요구한다.


​독서가 외부의 지식을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베르니케 영역(Wernicke's area, 언어 이해) 중심의 '소비' 과정이라면, 글쓰기는 내면의 파편화된 생각을 논리적으로 구조화하여 밖으로 꺼내는 브로카 영역(Broca's area, 언어 생성)과 전두엽의 총체적 '생산' 과정이다.

뇌의 입장에서 글쓰기는 수많은 신경망이 동시에 땀을 흘려야 하는 고강도 웨이트 트레이닝과 같다.


​미래 인재의 무기, 생각하는 글쓰기
독락서쾌에서 만난 민준학생은 방대한 독서량을 자랑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머릿속에 떠도는 화려한 개념들을 한 줄의 문장으로 꿰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준학생에게 필요했던 것은 완벽한 첫 문장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을 내려놓고, 엉성하더라도 생각의 조각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훈련이었다.


질문과 토론을 통해 아이가 스스로 생각의 뼈대를 세우도록 돕자, 민준학생의 글은 단순한 줄거리 요약을 넘어 자신의 고유한 관점이 담긴 단단한 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는 인공지능이 초안을 작성하고 정보를 요약해 주겠지만, 결국 그 도구들을 통제하고 최종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기계의 뛰어난 연산 능력과 인간의 깊은 통찰력이 결합된 '켄타우로스형 인재'의 핵심 역량은 다름 아닌 '스스로 생각하고 글로 써내는 힘'에서 나온다.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도 인간이 판단의 중심을 잃지 않는 '휴먼 인 더 루프(Human-in-the-loop)'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가장 치열한 아날로그적 글쓰기 훈련이 필수적이다.


​백지의 공포를 넘어 창조자로
아이에게 글쓰기는 평가받는 문법 시험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논리적으로 창조하는 안전한 실험실이 되어야 한다.


책을 읽고 단 세 줄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끄적여보는 경험, 정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 서투른 논리를 전개해 보는 훈련이 아이의 뇌를 소비단에서 생산단으로 진화시킨다. 읽는 뇌로 세상의 지식을 탐험했다면, 이제 쓰는 뇌로 자신만의 우주를 단단하게 지어 올릴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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