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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Jul 30. 2017

메테오라, 생애 처음 뛰어오르다

그리스 여행기 4

중세 수도원의 삶은 녹녹치 않았다. 그리스도교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로움을 억압했다. 인간은 죄인이었고 웃어서도 안 되는 존재. 그래서 움베르트 에코는 중세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이를 모티브로 삼는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썼다는 희극론이다. 


수도원의 금서로 암암리에 전해져 오는 희극론은 근엄하고 엄숙해야 할 수도원과 상극을 이루는 내용을 담았다. 웃음이란 권력을 비판하고 풍자할 때도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희극론’은 움베르트 에코가 상상한 가상의 책. 그러나 ‘장미의 이름’에서 연쇄살인의 원인이 ‘희극론’에 있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수도원이 얼마나 폐쇄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지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원은 14세기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철학자. 그리스의 고대 문헌들은 기독교 교리를 학문으로 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리스의 철학과 수사학, 논리학들을 바탕으로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신흥종교 그리스도교는 비로소 체계를 갖추고 신학으로 발전한다. 서로마제국의 본산이었던 이탈리아의 수도원은 종교적 수도의 성소이기도 했지만 학문의 중심지이자 권력의 발원지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세속과의 구분도 모호해지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10세기 이후 이슬람교로 무장한 오스만 제곡은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이 와중에 그리스정교의 수도사들이 서방으로 망명한다. 그리스에 남아 있던 수도사들도 자신들의 은둔처를 찾아 험한 곳으로 찾아 떠난다. 그 중에 한 곳이 바로 메테오라였다. 12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바위봉우리 위에 세워진 수도원은 20개에 달했다.  


한국에서도 가톨릭의 수도원을 몇 곳 가봤다. 그러나 한국의 수도원이란 서구의 수도원과 비교했을 때 아직 세월의 누적되어 자체적인 역사와 사연을 가진 곳이 거의 드물다. 천주교는 조선 후기 국가적으로 탄압을 받다가 19세기 후반 프랑스와 통상조약 이후에 비로소 국가의 탄압에서 벗어나 종교의 자유를 누린다. 여기에 한국전쟁 와중에 북한에 남아 있던 수도원들은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따라서 국내에서 갈 수 있는 가톨릭 수도원은 길게 잡아봤자 100년이 채 안된 곳들이다. 


한국의 수도원이 유럽의 수도원과 비교했을 때 또 다른 점은 한국 수도원은 가톨릭의 수도자들이 실제 수도를 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곳이지만 유럽의 수도원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국인들이 지닌 종교적 열성이 나타난다. 

유럽에서 가톨릭은 그들이 삶이었고 문화였고 혹은 국가였다. 유럽의 역사는 가톨릭과 정치가 분리되는 과정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유럽인들 대부분은 신앙을 일종의 관습으로 격하시켰다. 그 결과 유럽의 이름난 성당에 가도 정작 사제가 없거나 신자들이 드물고 수도원들은 관리가 안 되는 곳도 수두룩하다. 유럽에서 쇠퇴하는 가톨릭이지만 한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한국에서는 선교사 없이 자생해 아시아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내었고 아직도 신부나 수도자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가톨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럽의 수도원과 성당과 비교할 수 있는 우리의 불교 사찰들은 여전히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름난 사찰에는 오히려 큰스님들이 법회를 여신다. 즉 종교적으로 볼 때 한국이 지닌 특이한 열성과 몰입이 있다는 것이다. 


칼람바카에서 버스를 타고 메테오라로 가는 길 자체가 장관이었다. 검회색 돌기둥과 푸르른 숲 사이로 아침 하늘이 온전히 제빛으로 화창했다. 마음 같아서는 찬찬히 도보로 올라 한 군데 한 군데 다 찾아보고 싶었지만 1박2일 현지 한인 여행사 패키지로 왔기에 그런 여유를 즐길 수는 없었다. 새삼 한 달여에 이른다는 유럽 사람들의 휴가가 부러웠다. 사실 직장을 다니는 한국인 사십대 남성이 홀로 델피와 메테오라 1박2일 패키지를 오는 경우도 드물다는 게 안내했던 젊은 가이드의 말이었다. 실제로 1박2일 팀 중에서 홀로 온 경우는 나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싱글차지를 냈고 밥을 먹을 때도 애매한 상황이 많았다. 하지만 그러한 서러움(?)도 눈앞에 펼쳐지는 생전 처음 보는 풍경 앞에서 그다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첫 번째 간 곳은 6개의 수도원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그레이트 메테오라 수도원이었다. 아침 일찍 출발한 덕에 다행히 아직 관광객들로 북적이지는 않았다. 주차장에서 수도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300여개. 그나마 등산이 취미였던 것이 이런 데서 효과를 봤다. 다른 일행들보다는 수월하게 올라갔다. 다만 아침부터 작열하는 그리스의 태양은 ‘가시광선’의 가시가 나뭇가지의 그 가시처럼 흩뿌렸다.


그레이트 메테오라. 말 그대로 가장 큰 수도원이었다. 6개의 수도원 중에서 규모가 컸고 남아 있는 것도 많다고 했다. 수도원은 일종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 안에 커다란 부엌이 있었고 공구를 쌓아놓는 공방이 있었고 예배당이 있었고 마당이 있었고 또 세상을 떠난 수도사들의 유골을 모아놓은 자은 납골당도 있었다. 여기에 박물관과 상점 등 1900년대 이후 다시 복원하면서 생긴 여러 공간들로 빼곡하면서도 비좁게 느껴지진 않았다. 또 과거에 쓰던 도르레도 볼 수 있었다. 


수도원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기대했지만 여느 관광지처럼 그 공간과 온전히 감응하기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 대부분은 그야말로 ‘관광객’. 그레이트 메테오라를 순례자의 자세로 돌아보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그레이트 메테오라의 경우 관광지로서 기능할 뿐 본래 수도원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했다고 한다. 6개의 수도원 중에 실제로 그리스정교회의 수도사들이 거주하며 수도하는 곳은 딱 한 곳 밖에 되지 않는다고. 그런 측면에서 우리나라 사찰의 스님들이 달리 보였다.   


두 번째 간 곳은 발람 수도원. 6곳의 수도원 중에 가장 아기자기 하고 어여쁜 곳이라고 했다. 수도원의 공간 구성 자체가 그레이트 메테오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풍경은 달랐다. 보다 탁 트인 공간이었다. 박물관도 그레이트 메테오라의 박물관 보다는 제의나 성작 같은 종교적인 유물이 많았다. 그늘에 앉아 카스트라키 마을 너머 펼쳐진 그리스의 산과 들을 보았다. 한국의 산에 올라 원경을 보면 듬성듬성 아파트가 보이지만 이곳은 그런 게 없었다.  


 


애초에 기대했던 종교적인 분위기를 메테오라의 수도원에서 감응하기는 어려웠다. 아마도 사람이 드문 시간에 천천히 둘러봤으면 그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 수도원이 지어질 때는 세상 각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번잡하게 드나드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정교회 신자가 아닌 이들이 볼거리 삼아 그곳을 오갈지 조금이라도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메테오라의 수도원은 그 자체로 작은 자급자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어디로 도망갈 수 없는 그 허공의 공간에서 오직 신앙을 위해 금욕과 고난을 자처했다. 물론 그 안에서 그들이 느낀 종교적 평화와 기쁨과 숭고함과 일치는 이러한 것들을 상쇄시켰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종교적 독선에 빠져 지금의 기준에서 봤을 때 그릇된 행동이나 선택을 한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종교적 공동체를 이루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그 곳에서 생을 마감했던 수도사들은 죽음의 순간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어떤 상념이 들었을지 궁금했다.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며 기뻐했을까? 아니면 지긋지긋했던 이곳의 삶을 마감할 수 있었다며 기뻐했을까? 


이렇게 홀로 쓸데없이 형이상학적인 상념에 빠져있었을 때 일행이었던 아주머니께서 한 마디 했다. 


총각. 놀러 왔으면 웃어야지. 왜 그리 심각해요?   


다시 아테네로 돌아가기 전 메테오라가 한 눈에 보이는 절벽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젊은 가이드는 일행들에게 다양한 포즈를 요구했다. 저마다 행복한 표정으로 사람들은 추억을 남겼다. 괜히 쓸데없이 진지하게 이 시간을 보낸 듯싶었다. 한나절 먼 이국 땅 신기하게 만들어진 수도원을 보았다고 해서 내 인생의 어떤 해답이 나오거나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일. 그러기엔 나는 평범하고 평범한 그래서 또 수도원에서 살았던 중세의 수도사들과 달리 세상의 온갖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만끽하고 울고 웃고 화내고 성내고 또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어떤 면에서 또 자유로운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여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을 시도했다. 일행 중 아주머니께서 위험하지 않을까요? 하며 말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고개를 살짝 흔들며 괜찮다고 했다. 젊은 가이드는 주뼛 하면서도 용기를 주었다. 순간이지만 힘껏 뛰어올랐다.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움직임. 내 생애 첫 점프샷은 그렇게 메테오라를 떠나기 전 내 휴대폰 카메라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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